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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31. 2018

불 지르는 세상의 역설, '쓰리 빌보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틴 맥도나가 만든 세 편의 장편영화에서 한결같이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빼어난 각본일 것이다. 살인자의 아이러니를 벨기에 도시의 풍광 속에 담은 범죄스릴러 ‘킬러들의 도시’, 창작하는 각본가의 아이러니를 비정상적 시공간에 욱여넣은 메타영화 ‘세븐 싸이코패스’에 이어, 이번에는 비틀린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강력한 사회드라마 ‘쓰리 빌보드’다.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면서도, 마틴 맥도나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블랙코미디로서 굉장한 매력을 지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쓰리 빌보드’ 역시 논쟁 가득한 소재들로 플롯을 다루어내는 진중함과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플롯을 이끌어가는 기발함이 돋보이는데, 그래서 이 영화는 진진한 사회드라마로도, 씁쓸한 블랙코미디로도 훌륭하게 기능한다. 각본의 독창성 위에 얹어진 최적의 타이밍이야말로, 사회드라마와 블랙코미디 사이 이야기의 균형을 러닝타임 내내 유지하고 있다.



잔악무도한 범죄의 희생양이 된 딸을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에빙 시 외곽의 빌보드 세 개를 빌려 광고를 싣는다. 세간의 관심은 집중되지만 여전히 범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고, 여기에 경찰관 딕슨(샘 록웰),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 등 밀드레드 주위의 다양한 군상들이 이야기 속에 얽혀들자 이야기의 전개는 궤도에 오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름아닌 마틴 맥도나의 영화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쓰리 빌보드’는 결코 평범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의 중심인물 중 하나로 보였던 윌러비가 자살하는 순간, 이 영화의 전개는 예측불허의 급물살을 탄다. 그러니 이 영화는 범죄를 추적하거나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평범한 사회고발 드라마가 아니다. ‘쓰리 빌보드’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세 차례의 방화(放火)에 담긴 각각의 의미와 그 전말이 밝혀지는 순서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영화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예측할 수 없는 전개도, 그 기저에 깔린 교묘한 함의도 비로소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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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방화


이 영화에는 총 세 번의 방화가 등장한다. 첫 번째 방화,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이 소녀를 불태워 살해한 방화. 두 번째 방화, 밀드레드의 전남편 찰리(존 호크스)가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을 불태운 방화. 세 번째 방화, 불타버린 빌보드에 대한 보복으로 에빙 경찰서에 불을 지른 밀드레드의 방화. 헌데 시간 순서대로라면 세 건의 방화는 방금 언급한 순서대로 일어나지만, 누가 불을 질렀는지가 관객들에게 밝혀지는 것은 정반대의 순서라는 점이 중요하다. 세 번째 방화를 저지른 인물이 밀드레드라는 사실은 숨김 없이 드러나 있지만, 두 번째 방화를 저지른 인물이 찰리라는 사실은 밀드레드가 세 번째 방화를 저지른 이후에야 밝혀지며, 첫 번째 방화를 저지른 익명의 범인은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이가 등장할 뿐)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화의 시점과 방화의 주체가 밝혀지는 시점이 완전히 거꾸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점은 무엇이며, 나아가 첫 번째 방화의 익명성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걸까. 우리는 각각의 방화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 세 번째 방화는 단죄(斷罪)의 방화다. 누군가가 빌보드를 불태웠으며 (불타고 있는 빌보드의 바로 전 장면에서 집을 떠나는 딕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는 선입견을 유도한다) 그 범인이 경찰 관계자라고 생각한 밀드레드는, 에빙 경찰서에 불을 지름으로써 두 번째 방화를 단죄한다. 밀드레드는 영화의 초반부 윌러비 서장과의 대화에서, 만약 범인을 잡기 힘들다면 세상 모든 남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뒤, 죄를 저지른 순간 DNA를 대조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회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밀드레드의 논리에 따르면, 그녀는 스스로를 범죄의 단죄자로 규정한다. 원칙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그녀의 믿음과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단할 길이 없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범죄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 경찰들에게 향해 있는 상태였다. 경찰들이 빌보드 광고판에 불을 질렀을 거라고 짐작한 밀드레드는, 에빙 경찰서에 불을 지르는 자신 나름대로의 단죄를 통해 보복을 감행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외의 피해자가 등장한다. 그건 인종주의자이자 폭력주의자였던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악인처럼 묘사되던) 딕슨이었다. 그러자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해할 생각은 없었던 밀드레드의 단죄는, 그 인과가 뒤틀린 채 딕슨을 대상으로 삼고 말았다.


찰리가 빌보드 광고판에 불을 지른 두 번째 방화는 속죄(贖罪)의 방화다. 흥미로운 것은, 상술했듯 이 영화에서 빌보드에 불을 지른 범인이 찰리라는 사실이 밀드레드가 이에 대한 보복성 방화(세 번째 방화)를 저지른 뒤에야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녀가 불을 지른 시점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제임스(피터 딘클리지)와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밀드레드는 전남편 찰리와 그의 애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야 두 번째 방화의 진실이 밝혀진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방화가 두 명의 속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찰리가 빌보드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불을 질렀고, 그 불은 딕슨에게 화상을 입혔다. 딕슨이 불길에 뛰어들기 전, 윌러비가 자살 전에 남긴 편지를 읽고 있었다는 점과 안젤라의 사건 파일을 무엇보다도 먼저 챙겼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딕슨이 경찰서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간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속죄의 불길로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인종주의자이자 폭력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며 이 영화에서도 숱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던 그는, 불길에 뛰어든 그 순간부터 흥미롭게도 밀드레드의 쪽에 서기 시작한다. 한편, 찰리의 방화는 밀드레드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밀드레드는 자신이 냉소적인 행동을 일삼고 제임스를 난쟁이(midget)라 부르며 부지불식간에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술병을 손에 쥐고도 찰리와 그의 애인에게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그 순간 환기되는 격언이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한다(Anger begets greater anger)’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을 힐난하는 치과의사의 손톱을 드릴로 뚫어버리거나 차창에 깡통을 던진 아이들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응징하던 그녀의 모습과, 술병을 내리칠 기세로 들었지만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은 확연하게 대비된다. 그 저녁식사 자리에서, 밀드레드는 자신이 딕슨에게 (신체적으로) 그리고 제임스에게 (정신적으로) 위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술병을 내려놓음으로써 (두 번째 방화의 범인인) 찰리에 대한 단죄를 포기한다. 이건 원칙주의자이자 행동주의자였던 그녀 나름대로의 속죄였다. 이후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서, (자신이 옳다고 믿은 바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밀드레드와 딕슨에게 단죄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익명의 존재가 저지른 첫 번째 방화는 원죄(怨罪)의 방화다. 그 어떤 변명과 이유를 대더라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 악질 범죄는, 불을 지르고 생명을 앗아갔다는 점에서 절대로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근원적인 성질의 죄악이다. 허나 ‘쓰리 빌보드’에서 이 원죄를 저지른 방화의 주체는 영화가 끝나는 시점까지 밝혀지지 않고, 사건의 진범은 끝까지 익명으로 남는다. 영화가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밝혀진 것이라고는, 하나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간 이 원죄와 유사한 짓을 저지른 다른 범죄자가 미주리에 들렀으며 아이다호에 살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밀드레드의 가게로 찾아와 그녀를 협박한 익명의 인물과, 술집에서 자신의 범행을 딕슨에게 들릴 정도로 떠들었던 익명의 인물이 사실 (아이다호의 범죄자라는)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관객들 뿐이었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이 인물을 각각 한 번씩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이 두 가지 사건에 한 인물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 정보의 비대칭성은 그래서 관객들에게 기묘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마치 피크닉을 떠나듯 간식과 총기를 함께 챙겨 단죄의 로드트립을 떠나는 밀드레드와 딕슨은, 온갖 아이러니가 산재한 작은 세상 ‘에빙’을 지나 세 개의 빌보드를 넘어서, ‘아이다호’라는 다른 세상으로 향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결말부에서는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무력감보다는,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를 처단하러 가는 여정이 선사하는 기묘한 위안감이 남게 된다.


그러니까 마치 피해자를 죽인 개별적 범인에 대한 고발처럼 시작되었던 이 영화는, 강간 및 살인이라는 동일한 죄질을 지닌 세상 모든 익명의 범죄자들에 대한 고발로 확대된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이었던 범죄는 일반적이고 익명적인 범죄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건 밀드레드가 세상을 바라보는 염세적 시선과도 일치한다. 그녀가 영화 초반 윌러비에게 했던 말과, 집을 찾아온 신부에게 했던 갱단 이야기를 떠올려보라.) 이 과정을 세 차례의 방화를 통해, 그리고 그 안에 역순으로 녹아들어있는 원죄와 속죄, 그리고 단죄의 양상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유용하고 있는 ‘쓰리 빌보드’의 각본은 정말이지 치밀하고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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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빌보드


한편, 이 영화에서 세 건의 방화와 그 전말의 순서를 뒤집은 것과 정확히 동일한 양상으로,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과 그 목격의 순서를 뒤집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밀드레드가 광고로 내건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은, 순서대로 보자면 잔인한 사건의 실체를 가감없이 묘사하는 첫 번째 빌보드인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다(Raped while Dying)’,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을 되묻는 두 번째 빌보드인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And Still No Arrests?)’, 그리고 책임자를 정확히 지목하는 세 번째 빌보드인 ‘어떻게 된 건가, 윌러비 서장?(How Come, Chief Willougby?)’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단언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빌보드의 내용은, 의문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빌보드에 이르러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한 현실 그 자체를 저격한 뒤, 세 번째 빌보드에서 다시금 책임의 주체를 좁혀서 특정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처음 빌보드를 목격하는 시점에서 이 세 개의 빌보드를 순서대로 보게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컨대, 딕슨은 한밤중에 경찰차를 운전하다가 광고를 붙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지만 세 번째 빌보드부터 차례로 경찰차를 돌려가며 빌보드를 역순으로 본다. 로비(루카스 헤지스) 역시 밀드레드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세 번째 빌보드부터 고개를 돌리며 하나씩 돌아봐야 했다. (심지어, 밀드레드 역시 광고를 세우기 전 폐허가 된 빌보드를 순서대로 보았을 뿐, 자신이 광고를 세운 뒤에 그 광고를 처음 보게 되는 것은 거꾸로였다.) 그러니까, 밀드레드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순서대로 세운 빌보드를 그 순서대로 목격하는 이가 (적어도 영화에서 제시되는 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의 맥을 짚어가는 데 단서가 된다.


앞서 설명한 빌보드 광고판의 순서를 거꾸로 돌려버리면, 책임의 주체를 윌러비 서장으로 특정한 뒤, 범인을 잡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저격하고, 마지막으로 그 범죄에 대한 직설적이고 일반적 묘사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특정성에서 보편성으로, 미주리 속 소도시의 현실에서 전 세계가 직면한 범죄의 현실로 이야기의 범위를 넓혀가려는 이 영화의 맥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쓰리 빌보드’의 빌보드 광고판을 활용한 사회적 고발이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특수성(영화)이 일반성(현실)으로 전이되는 양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모든 인물들을 본질적인 결점이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참담한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거나, 그릇된 현실을 지적할 정의가 없다. (사람들은 밀드레드의 입장에 공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세운 빌보드는 반대한다.) 사실 이 영화에 결격사유가 없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영화가 인간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아이러니는 더욱 심화된다. 이 영화 속 모두는 (밀드레드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측면에서든 죄가 있는(culpable)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밀드레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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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존재로 알 수 있듯, ‘쓰리 빌보드’는 범인의 복수성 그리고 익명성을 통해 잔혹한 범죄가 산재해 있는 사회의 단면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틀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비틀린 채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특히 밀드레드와 딕슨은) 선악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 나름의 결격사유를 지닌 죄 많은 인간들이었고,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을 거꾸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불 지르는 세상의 역설, 내지는 비틀린 사회에서 비틀린 채로 살아가는 법.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는 아이러니가 덕지덕지 묻은 촘촘한 그물망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작금의 사회에 통렬한 불화살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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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dir. 마틴 맥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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