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데뷔 이후 계속해서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만들어오던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의 여덟 번째 장편 ‘팬텀 스레드’에 이르러 극의 배경을 홀연히 영국 런던으로 틀었다.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라는 영화의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언뜻 유령의 바느질로 완성된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묘하게 신비로운 동시에 우아하게 매끄럽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걸출한 필모그래피 상에서라면 상대적으로 (‘펀치 드렁크 러브’와 같이) 소품격의 작품으로 파악될 여지를 지녔지만, 그 깊이를 헤아려보면 ‘팬텀 스레드’는 그의 작품세계 내에서 쉽게 넘겨짚을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하나의 직업군 내에 속하는 이들의 폐쇄적인 세계를 밀도있게 그려내는 동시에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멜로의 장르적 정서를 함께 담아내는 수준을 넘어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관 속에서 진진하게 탐구되어 오던 주제의식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까지 얹어내고 있는 이 작품은, 도무지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는 환상적인 걸작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특정한 삶의 배경을 공유한 인물들의 소사회가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왔고, 그 안에 마치 이물(異物)과도 같이 새롭게 들어오게 된 누군가의 존재가 내러티브의 전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곤 했었다. ‘팬텀 스레드’에서는 런던의 1950년대 의상디자인 업계라는 소사회 속에서, 레이놀즈(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시릴(레슬리 맨빌)의 강박적인 직업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알마(비키 크리엡스)의 존재가 그러하다. 그러나 (‘매그놀리아’의 필, ‘펀치 드렁크 러브’의 레나, ‘마스터’의 프레디가 모두 그랬듯이) 이물의 틈입으로 균열이 일어난 소사회 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쥐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속에 새롭게 비집고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그러니까, ‘팬텀 스레드’는 당연하게도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의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는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지에 대한 역학이다. 관계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누구인가.
동시에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결핍에 시달리는 이들의 개인사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왔고,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팬텀 스레드’는 (레이놀즈에 따르면 재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영화 속 어머니의 드레스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모성에 대한 근원적인 결핍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매그놀리아’의 지미와 얼,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마스터’의 랭캐스터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부성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키던 그의 몇몇 영화들과 비교될 때 특히나 흥미롭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세계 속에서는 실제 부자관계만큼이나 유사 부자관계가 내러티브의 중요한 축을 이루어왔는데, ‘팬텀 스레드’에서 역시 실제 모자관계와 유사 모자관계가 드러나는 양상이 중요하다. 결국 ‘팬텀 스레드’는 모성을 사랑과 기묘하게 연관짓는 지점까지 나아가는데, 모성을 사랑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흔적을 지워가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는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관계 속에서 버려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 기이한 멜로영화는 관계의 주도권을 쥐는 이가 누구인지와, 관계를 완성시키기 위해 버려지는 것이 무엇인지의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팬텀 스레드’에 마치 안개처럼 서려있는 것은 유령의 흔적이고, 마치 잉크처럼 퍼져있는 것은 애증의 독성일 것이다. 이 영화는 언뜻 평범하게 보였던 사랑이야기가 장르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 날카로운 본색을 드러낸다.
드레스를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레이놀즈는 누이 시릴과의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에 대한 꿈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데, 레이놀즈는 어머니의 꿈을 꾸며 그녀의 부재에 새삼 시달리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레이놀즈의 어머니는 그가 16살 때 (두 번째 결혼으로) 자신의 곁을 떠났고, 그에게 남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자신이 지어준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 속 모습 그대로이다. 레이놀즈는 코트의 가슴께에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넣어 재봉하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하려 하지만, 결국 부재하는 어머니는 결핍된 상태로만 응어리져 맺힌 상태이다. 어머니의 유령은 레이놀즈의 마음 속에서 한결같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며, 그 유령은 레이놀즈에게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령을 자신의 주위에서 쫓아내려 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그 환경에 융화된 상태였다.
시릴의 제안을 따라 옛날에 살던 고향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 아침식사를 하러 들른 식당에서 레이놀즈는 알마를 만난다. (레이놀즈와 알마의 첫 만남에서 묘사되던 것처럼 식탁에 앉은 레이놀즈와 서 있는 알마의 상대적인 위치관계는, 이후 앉아서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감상하는 레이놀즈와 서서 그 드레스를 입고 자신감을 뽐내는 알마의 위치관계로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운명적 끌림과도 같은 만남 뒤에, 서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드레스를 손수 지어주기로 결심한 순간, 시릴의 합석과 함께 알마는 비로소 그들의 소사회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궁금해하는 알마의 질문에, 레이놀즈는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마치 미신처럼 느껴지는 이 말은, 레이놀즈의 주위에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유령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 전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레스’라는 것은 곧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를 의미하고, 어머니는 곧 꿈 속의 유령이다.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면, 이 영화에서 (혹은, 적어도 레이놀즈의 강박적인 삶 속에서라면) 드레스가 존재하는 한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원하는 사랑의 종착지는 결혼이 될 수 없다. 즉 레이놀즈를 사랑하게 된 알마는 그의 곁에서 드레스를 없애버려야 하는 사명에 놓인다. 바꾸어 말하자면,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유령이 레이놀즈의 주변에 머무르는 한 알마는 그와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놀즈와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드레스를, 어머니를, 유령을 사라지게 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했던 이전 연인을, 시릴과 레이놀즈는 ‘10월 드레스’를 주면서 거칠게 밀어냈다.) 이는 곧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 속에서 알마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분명하게 제시되듯, 알마는 드레스, 어머니, 그리고 유령을 자신이 모두 대체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드레스를 입고, 레이놀즈의 상징적인 어머니가 되며, 레이놀즈 곁의 유일한 유령이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유령(phantom)은 바로 알마를 가리킨다. (시릴은 레이놀즈와 알마가 다툰 직후, 그녀를 ‘유령’이라고 칭한다. 한편 알마(Alma)는 스페인어로 영혼, 또는 정령을 의미한다.) 알마는 레이놀즈가 (옷의 솔기 속에 자신만의 문구를 숨김으로써) 영혼을 담아 완성한 드레스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통해서, 레이놀즈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드레스로 상징되는 유령 혹은 어머니의 그림자를 지우려 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드레스는 세 벌이었고, 이들은 모두 레이놀즈가 완성한 것이었다. (이제는 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된) 어머니의 드레스, 바바라 로즈(해리엇 해리스)의 드레스, 그리고 프랑스 공주의 드레스. 되짚어보면, 이 세 벌의 드레스는 모두 알마의 의도에 의해 각각 사라지고, 벗겨지고, 찢겨진다.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버려지는 것은 레이놀즈가 바바라 로즈에게 만들어 준 드레스였다. 바바라 로즈가 드레스를 입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그녀의 드레스를 빼앗으러 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바라 로즈가 입은 채로 잠든 드레스를 벗겨서 빼앗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 속에서 바바라 로즈와 레이놀즈의 어머니가 겹치도록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바바라 로즈와 레이놀즈의 어머니는 모두 두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결혼에서 드레스를 만들어 준 것은 공통적으로 레이놀즈였고, 어머니가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바바라 로즈는 레이놀즈의 금전적 기반을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는 어머니의 드레스이기도 하다. 레이놀즈에게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를 빼앗을 것을 제안함으로써, 알마는 실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드레스 대신 실재하는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를 벗겨낸다.
다음으로, 프랑스 공주에게 의뢰받아서 완성된 드레스가 있다. 알마가 차에 빻아서 넣은 독버섯을 먹은 직후, 레이놀즈는 완성된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중 그대로 드레스 위로 쓰러진다. 그 다음 장면에서 시릴은, 드레스에 구멍이 났으며 구두약이 묻었기 때문에 드레스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보고를 전해듣는다. 그리고 레이놀즈의 손길이 깃들지 않은 새 드레스를 만들 때, 알마는 굳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로부터 레이놀즈가 솔기에 박아넣은 문구인, ‘저주받지 않았다(never cursed)’를 자신의 손으로 뜯어낸다. 그러니까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는 알마가 그에게 독버섯을 먹였기 때문에, 레이놀즈 본인에 의해 찢겨진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드레스를 망가뜨리는 것은 실재하는 드레스를 없애는 것과 동시에 레이놀즈가 드레스에 부여했던 (숨겨진 글귀로 상징되는) 영혼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결국 유령을 사라지게 하는 행위다.
마지막은 어머니의 드레스였다. (사실 이 드레스는 세 벌의 드레스 중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이기도 했다.) 알마를 처음 만난 뒤 자신의 고향집에서 과거를 회술하는 도중에 언급되는 어머니의 드레스는, (레이놀즈의 말에 따르면 재가 되었거나 누더기가 되어)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실재하지 않는 이 드레스를 알마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독버섯을 먹은 뒤 침대에서 앓고 있는 레이놀즈의 앞에는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환영이 나타나는데, 레이놀즈와 유령만이 존재하던 그 공간에는 알마가 들어온다(이 모두는 동일한 쇼트 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알마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순간, 드레스를 입고 있던 어머니의 유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레이놀즈를 침대에 눕힌 직후, 알마가 구두를 벗고 발소리를 없앴다는 점 역시 이와 관련된다. 레이놀즈는, 아침식사 자리에서 소리를 내는 알마를 언짢아하곤 했다.) 그렇게, 이번 경우에는 드레스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마는 (구두를 벗고 유령이 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와 어머니의 유령, 그리고 어머니의 드레스를 레이놀즈의 환영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를 (레이놀즈와 함께) 직접적으로 빼앗음으로써 ‘어머니’의 존재를 지우고, 프랑스 공주의 드레스를 (레이놀즈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망가뜨리게 함으로써 ‘유령’의 존재를 뜯어내고, 레이놀즈에게 나타난 어머니의 유령이 입은 드레스를 상징적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알마는 비로소 레이놀즈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레이놀즈는 독버섯 때문에 앓아누운 뒤 ‘나을 수 있을까’라며 알마에게 부정적인 말을 뇌까렸지만, 바로 다음날 거짓말처럼 회복한다. 그런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모습이다.
레이놀즈의 몸이 나은 아침, 소파에 누워 있는 알마와 화면으로 걸어들어오는 레이놀즈, 그리고 그 옆의 드레스를 함께 비추던 카메라의 앵글은 (드레스를 화면의 왼쪽으로 밀어넣는 동시에) 서서히 알마와 레이놀즈에게로 다가간다. 이 시점은 알마가 세 벌의 드레스를 모두 없앤 후였고, 그렇다면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던 레이놀즈의 말은 이제 번복될 수 있는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청혼한다. (이 청혼은 플롯 상으로 봤을때는 지나치게 급작스럽지만, 영화의 구조 상으로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드레스를 없앴으니, 레이놀즈는 결혼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놀즈의 청혼에 한참을 망설이던 알마는 마침내 승낙의 대답을 전한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알마가 마침내 대답하는 시점이 드레스가 왼쪽 구석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바로 그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마가 세 벌의 드레스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모두 없앤 뒤에야, 심지어는 프로포즈하는 레이놀즈를 비추는 장면에서 (결혼할 수 없는 이유라고 제시되었던) 드레스를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 뒤에서야, 알마는 대답하고 그들은 마침내 결혼하게 된다.
이 영화에 안개처럼 서린 유령의 흔적을 지웠으니, 이제 이 영화에 잉크처럼 퍼진 애증의 독성을 들여다 볼 차례다. 처음 독버섯을 먹인 시점에서부터, 레이놀즈와의 관계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알마는 레이놀즈를 아기로 만든다. (영화의 초반부, 알마는 레이놀즈가 가끔 아플 때마다 버릇없는 아기(spoiled child)가 된다고 말했다.) 레이놀즈의 주위에서 이미 어머니의 유령과 어머니의 드레스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남은 것은 알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 결핍된 모성애의 방향은 알마에게로 향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알마와 레이놀즈의 관계는 실로 기묘해서, 알마의 무릎에 누운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의 관계는 유사 모자관계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 권력의 위계가 뒤바뀔 조짐이 다시금 보이자(레이놀즈는 시릴에게 알마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두 번째 독버섯이 등장한다. 레이놀즈의 눈 앞에서 독버섯을 요리하는 알마의 모습과, 이를 보고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레이놀즈의 모습. 첫 번째 독버섯이 레이놀즈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간접적인 방식이었다면(실제로 그 독버섯에 대해 당시의 레이놀즈는 알지 못했다), 두 번째 독버섯은 우위를 점한 그와의 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직접적인 방식이다(이번에는, 독버섯에 대해 레이놀즈 역시 알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음식을 내온 뒤 물을 두 잔 따르는데, 자신의 물을 따를 때 주전자를 의도적으로 더 높이 치듦으로써 자신이 가진 권력의 역학적 우위를 상징적으로 역설하기까지 한다.
첫 번째 독버섯은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라는 환각을 선사했다. 두 번째 독버섯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끝나버리고 말지만, 우리는 레이놀즈가 경험할 환각이 ‘드레스를 입은 알마’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드레스를 입은 알마가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 동일하게,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는 레이놀즈와 서서 드레스를 입은 알마의 위치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주변에 존재하던 유령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 뒤 스스로 레이놀즈 주위의 유일한 유령이 되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독버섯을 먹은 뒤, 레이놀즈가 쓰러져 자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알마의 모습은 레이놀즈와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모습이다. 이때 그녀에게 사랑의 완성이란 레이놀즈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고, 아플 때마다 아기가 되는 그를 돌봐줄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증이라는 독성. 얼핏 애(愛)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관계는, 증(憎)이 닥쳐올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성을 통해 다시 애(愛)로 돌아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멜로영화가 또 있을까.
한편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고려하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레이놀즈는 권력의 우위에 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이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중간에 군데군데 등장하는 알마의 독백처럼 보이던 장면들은 사실 레이놀즈를 진찰하기 위해서 찾아 온 하디(브린 글리슨)와의 대화였고, 곧 하디의 시점 쇼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시간 순으로 보면 두 번째 독버섯을 먹은 레이놀즈가 쓰러진 뒤에 놓여 있었다. 알마와 하디의 대화를 제외하고 이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파악해보면, 그 구조는 레이놀즈가 갖고 있던 권력이 알마에게로 옮겨간 것으로 보였다. (마치 알마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영화의 첫 대사는, 레이놀즈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었으며 자신은 레이놀즈에게 그가 가장 욕망하는 것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애초에 레이놀즈를 진찰하기 위해 찾아온 하디에게 알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시간적으로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위치해야 할 알마와 하디의 대화를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심지어 중간에도 삽입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플래쉬백이 되고야 마는) 이 이야기를 서술할 권력을 지닌 것은 애초에 알마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팬텀 스레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마는 먼지와 유령과 시간에 빛바래지 않도록 드레스를 지킬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당연히,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재로 변해버린 어머니라는 유령의 드레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드레스에게 일어났던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는 알마의 이 말은, (알마와 레이놀즈의 유사 모자관계를 고려했을 때) 자신은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임을 단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곧 알마에게 있어서는, 레이놀즈의 어머니와 달리 두 번째 결혼이 없을 것이며, 레이놀즈가 만들어 준 드레스를 입고 그를 떠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 영화의 엔딩에 인서트 쇼트로 삽입된 장면은, (레이놀즈가 탐탁치 않아했지만 알마는 진정으로 가고 싶어했던) 새해 맞이 첼시 아트클럽 무도회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는 알마와 레이놀즈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람이 가득한 파티장 속에서 레이놀즈는 알마를 찾기 위해 번잡한 홀을 가로질러서 벽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일한 파티장 안에는, 화면의 가장자리로부터 몇몇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오직 그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알마와 레이놀즈만을 클로즈 업으로 재차 잡아낸다. 음악도, 군중도 사라진 이 순간은 마치 시공간이 얼어붙은 진공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알마가 사후 세계까지 거론해가며 사랑의 영속성을 역설하는 마지막 장면 속에서 알마와 레이놀즈는 일종의 초월자가 되어 영원 속으로 회귀한다.
레이놀즈 우드콕은 영혼을 담은 문구를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드레스’) 안에 심어놓곤 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야말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영혼을 담은 이야기를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영화’) 안에 어떻게 심어놓을지에 대한 숙고의 결과이다. ‘팬텀 스레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여전히 훌륭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다. 형체 없는 이야기와 소재의 조각들을 바늘땀도 보이지 않도록 능수능란하게 기워내는 유령의 바느질. 이런 멜로영화를 대체 폴 토마스 앤더슨 말고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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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스레드 (Phantom Thread, 2017)
dir. 폴 토마스 앤더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