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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7. 2018

안긴 사진과 안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관찰자가 현실을 대하는 시선과 카메라가 현실을 담아낸 순간이 영화적으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에 그 관건이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을 연출자의 의도라 한다면 카메라의 순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고, 다큐멘터리는 이 두 가지를 합일(合一)해서 만들어진다. 그 합일의 방법은 치밀하게 구축된 것일수도, 혹은 우연하게 포착된 것일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마치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만 같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이면서 다큐멘터리의 틀을 벗어나려 (다른 말로 하자면, 픽션이 되려) 애쓰는 것만 같은 이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목표한 사명을 달성하고자 하거나, 전기물의 틀을 빌어 특정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숱한 다큐멘터리들과는 꽤나 다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는 이야기의 초점이 카메라 밖의 관찰자와 카메라 안의 피관찰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특성에 힘입어, 관찰자가 피관찰자가 되는 장면 역시 빈번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는 카메라가 바라보는 현실만큼이나 현실이 바라보는 카메라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건, 결국 영화예술(과 함께 해온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예찬에 다름없을 것이다.



2.

이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는 ‘얼굴들, 마을들(Visages Villages)’이다. 그리고 극중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얼굴과 마을,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풍경들 속에는 마을이 있고, 그 마을들 속에는 얼굴이 있다. 풍경(paysages)이라는 마을, 마을(villages)이라는 얼굴, 얼굴(visages)이라는 풍경. 결국 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세 가지 소재는 원을 그리고, 그 원은 현실과 역사를 포괄함으로써 서로 단단히 엮여있다.


결국 현실과 역사를 아우르는 이 다큐멘터리는 세상 속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상 속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아녜스 바르다의 삶은 끊임없이 환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쌍방향적 다큐멘터리일 수밖에 없고, 카메라 밖과 카메라 안의 두 현실이 끊임없이 번갈아 호출된다.



그러니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카메라 안의 피관찰자들을 중심으로 보면 다양한 군상들을 한데 모아 다루는 옴니버스 영화지만, 카메라 밖의 관찰자들을 중심으로 보면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트럭을 타고 프랑스 전역을 누비는 로드무비다. 그러니까 때로는 몽상적이지만 다분히 현실적이고, 간간히 픽션같지만 결국엔 다큐멘터리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두 가지 구조적 특징인 옴니버스 영화적 성격과 로드무비적 성격을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우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형식적으로 옴니버스 구조를 지닌다. 벽면에 사진을 붙이는 예술가 JR의 아이디어를 영상화했다고 할 수 있을 이 영화는 프랑스 전역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것을 표면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바게트를 배급받는 마을의 사람들, 철거를 앞둔 마을에 남은 마지막 저항자, 수백 헥타르를 홀로 경작하는 마을의 창고지기, 작은 마을에 살아가거나 그 곳을 거쳐가는 사람들, 다른 근무시간으로 인해 서로 만날 수 없는 공장의 노동자들, 이제 유령마을이 된 곳에 삼삼오오 모여드는 사람들, 수십년 째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우편배달부, 염소를 키우고 유제품을 만드는 사람들,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초로의 예술가, JR의 할머니, 각자의 직업을 가진 항만 노동자들의 아내들, 그리고 아녜스 바르다의 사진 속, 기억 속 사람들까지. 결국 이 영화가 옴니버스라는 형식을 빌려 세그먼트처럼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삶이라는 풍경 속 수많은 마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얼굴들이었을 것이다. 때때로 뭉클하고 흐뭇하지만,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아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이 영화의 작중의도는 시종 날카롭다.


물론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벽에 얼굴 사진을 붙인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십수 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담아내는 과정에서, 이 영화는 개별 이야기 속에서도 다큐멘터리 외적인 다양한 요소들을 불러들이며 짙은 인상을 남긴다. 당연히, 벽에 붙여진 사진의 피사체가 된 사람들이 느끼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거나(철거 마을의 마지막 투쟁자), 자랑스러움이며(조상들의 사진을 벽에 붙인 후손들), 불편하지만 신기한 감정일 수도 있을 것이고(작은 마을 카페의 종업원),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경외이기도 할 것이다(동료들의 사진이 붙은 벽을 바라보는 공장의 직원).



그런데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의 촬영 대상이 된 피사체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완성된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점이 아니라 벽에 붙여진 자신들의 사진을 보는 시점이다. 이는 물론 영화가 완성되기 이전 시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 다큐멘터리의 일부분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촬영 대상이 된 사람들이 카메라 속에 담긴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다큐멘터리 자체에 담아내는 한 겹 안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영상과 사진의, 혹은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협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하나의 결과물(벽에 붙은 사진에 대한 피사체들의 반응)이 더 넓은 범위의 결과물(‘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 품어 안기는 구조. 이건 결국 아녜스 바르다가 극중 언급했던 액자식 구성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안긴 사진과 안은 영화, 그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주된 의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테니까.


정치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없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 영화는, 이를 지극히 영화적인 방법으로 표명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의 변두리에 놓인 작은 마을들과 그 안의 주민들이 처한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써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다루는 영화만들기의 입장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는 여성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온 JR의 시점에서 바라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물론 그렇다. 한편 영화예술 자체에 대한 경외심 역시 빠질 수 없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를 떠올리게 하고, 눈동자라는 소재를 통해서는 루이스 부뉴엘의 단편영화를 호출하며, 후반부에는 장-뤽 고다르의 장편영화를 직접적으로 오마주하는가 하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장-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그리고 아녜스 바르다의 남편이었던 자크 드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프랑스 영화사(史)를 훌륭하게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세그먼트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는 편집 역시 훌륭한데, 옴니버스 구조를 채택한 이 영화는 각각의 이야기들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쇼트 혹은 나레이션을 활용함으로써, 전체적인 짜임새를 더욱 더 치밀하게 다지고 있기도 하다. 일례로,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녜스 바르다와 JR은 위에서 바라본 시점을 언급하고, 그 직후 이 영화는 이전에 쓰인 적 없었던 공중 촬영을 통해 폐허가 된 마을을 위로부터 조감한다. 그러니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그리고 얼굴들을 벽에 붙인다는 행위를 통해 표현한 뒤, 이를 유기적으로 짜깁어 만들어 낸 일종의 영화적 콜라주라 하겠다.



4.

동시에,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여행의 주체가 아녜스 바르다와 JR이라는 점에서는 로드무비의 플롯을 지닌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에서처럼, 이 영화는 서로를 (길 위에서, 정류장에서, 빵집에서, 클럽에서) 네 차례나 만났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주인공들이 서로를 알게 된 뒤 시작된 이야기였다. (시작 부분부터 이 영화는 여타 다큐멘터리와 자신을 구별짓는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서로의 작품을 접해 온 양상이다. JR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들 중에서 1962년작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그리고 1980년작 ‘벽, 벽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아녜스 바르다의 필모그래피 상에서도 특정한 인물의 얼굴, 그리고 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다. 떠올려보면 이 다큐멘터리는 어떤 영화인가, ‘사람들의 얼굴을 벽에 붙이는’ 영화가 아니었던가. 반대로, 아녜스 바르다는 JR의 작품 중 기차를 타고 가다 본 거대한 눈들을 감명깊게 접했다고 말한다. 노년의 그녀가 눈에 병을 앓고 있다는 점과 이 영화에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상기해보자. 결국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이전에 접한 서로의 작품들은 이 영화의 핵심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둘이 공동 다큐멘터리를 위해 협업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벽에 사람들의 사진을 붙이는 JR의 아이디어를 출발점 삼아 포토트럭을 타고 여행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던 (카메라 안의 피관찰자에 집중하던) 이 다큐멘터리는, 후반부에 다가갈수록 (카메라 밖의 관찰자로 시선을 돌려) 아녜스 바르다라는 여성의 삶과 역사에 더 큰 부분을 할애한다. 장-뤽 고다르와 자크 드미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자체로 (아녜스 바르다가 큰 부분을 차지했던) 프랑스 누벨바그의 역사에 대한 찬미에 다름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초점은 카메라 안의 피관찰자들에서 카메라 밖의 관찰자로 서서히 바뀌어간다. 혹은, 이 영화의 성질은 후반부로 갈수록 메타영화적이다.


먼저 해변에 덩그러니 떨어진 벙커가 등장하는 세그먼트를 생각해 보자. 이 벙커에 어떤 사진을 붙일 것인지를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기 부르댕이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사진으로 결정한다. 극중에서 이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같은 건물의 벽면에 기댄 기 부르댕의 사진과 JR의 사진은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둘째, 해변의 벙커에 붙여진 기 부르댕의 사진은 하루만에 바닷물에 씻겨내려가고 만다. 기 부르댕과 JR의 사진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편집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시간을 연결하려 하는 반면, 하루만에 씻겨내려간 기 부르댕의 사진은 JR의 예술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간명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세그먼트를 통해서 예술의 영속성과 예술의 일시성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먼 시간을 건너서도 의미를 지니는 예술의 통시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가 이를 담아내는 예술의 공시성을 함께 끌어안고 있는 이 영화는 능숙하고 유연하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삶과 역사는 장-뤽 고다르와의 만남을 위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마지막 세그먼트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된다. 결국 그들은 고다르를 만나지 못하지만, 그가 남긴 메모는 아녜스 바르다의 삶(그녀와 함께했던 자크 드미)과 예술(그녀가 만들었던 ‘해변들’)을 부각한다. 결국 ‘사진’에 대한 JR의 발상으로 시작된 것 같았던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아녜스 바르다의 사유로 끝맺음한다. 이렇게 초점이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호출되는 예술의 역사가 인상적이고, 사진이라는 수단이 영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갖게 되는 지위 역시 흥미롭다.



5.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하고 뭉클한 순간들. 88살의 아녜스 바르다가 살아온 역사와 33살의 JR이 살아가는 삶이 카메라라는 수단을 촉매로 하여 만나는 순간의 시너지가, 이 영화에는 오롯이 담겨있다.



영화의 후반부, JR은 아녜스 바르다를 자신의 할머니에게 소개시켜준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 JR의 모습은 아녜스 바르다가 찍었던 과거의 기 부르댕과 겹쳐지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는 서로 다른 공간축과 시간축으로 존재하던 두 가지 시점을 병치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그건 현실(서로 다른 공간을 살았던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할머니)일 수도 있고, 사진(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던 JR과 기 부르댕)일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의 진심일 터이다. 이는 흔적 혹은 순간을 마치 벽화처럼 아로새기는 행위를 통해, 세대, 성별, 나아가 개인의 다름을 포용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윽고 JR은 아녜스 바르다의 눈과 발을 촬영한다. 사진으로 영원히 남게 될 아녜스 바르다의 눈과 발은, 화물 열차에 붙박인 채 머나먼 길을 떠난다. 영화의 첫 장면, 아녜스 바르다와 JR은 길 위에서 서로를 몰랐다고 회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녜스 바르다의 눈과 발이 되어 떠나가는 화물열차를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JR의 모습은, 그들이 더 이상 서로를 모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길 위에서 서로를 몰랐던 그들은, 길 위에서 함께하며 서로를 누구보다도 깊게 알게 되었다.


JR은 아녜스 바르다의 숱한 작품들 중에서도 얼굴과 벽을 다룬 영화를 가장 감명깊게 보았다고 말했고,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아녜스 바르다는 JR에게 얼굴을 벽에 붙이는 순간들을 선물했다. 반대로 아녜스 바르다는 JR이 벽에 붙인 눈을 가장 감명깊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JR이 아녜스 바르다에게 눈을 선물할 차례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JR은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리고 누구도 본 적 없었던 그의 맨눈은 관객인 우리가 바라보는 시점이 아니라, 동료이자 친구인 아녜스 바르다의 망막에 흐릿한 상으로 맺힌 시점으로 비추어진다. 그렇게, JR의 눈은 아녜스 바르다의 눈 속에서 평생 동안 기억될 것이다. 상(像)이 영상(映像)이 되는 순간, 그 차이는 비추어진다(映)는 데에 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삶의 풍경화를 액자에 넣어 품은 것만 같은 소중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카메라 밖의 관찰자와 카메라 안의 피관찰자 사이에서 안긴 사진과 안은 영화. 다큐멘터리는 관찰자의 시선과 카메라의 순간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달려있다고 모두(冒頭)에 언급한 바 있었다. 여기, 현실을 재구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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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Faces Places (Visages Villages, 2017)

dir. 아녜스 바르다,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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