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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05. 2018

닮음이라는 비극, '킬링 디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킬링 디어’의 이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어디로부터 온 걸까. 다가가거나 멀어져야 할 최적의 타이밍을 알고 움직일 뿐더러 때때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로우앵글 쇼트를 적극 활용하는 카메라 탓일까. 아니면 내내 신경에 거슬리게 깔려있다가 극적인 순간마다 감각을 짓누르는 불협화음에 가까운 음악 탓일까. 혹은 출연하는 작품마다 인상적인 모습을 선보이는 것을 넘어 필모그래피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배리 케오건의 뛰어난 연기 탓일까. 아마 이들 모두가 정답일 테지만, ‘킬링 디어’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과 신화의 속성에 대한 연출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공동각본가 에프티미스 필리푸의 스산한 성찰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닮음이라는 비극일 것이다.




기起.

그리스 출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마치 다양한 변인을 통제한 채 인물들을 던져놓은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그리스라는 공간적 틀을 벗어나 처음으로 만든 영화였던) 전작 ‘더 랍스터’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감정사회학 실험실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신작 ‘킬링 디어’는 복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윤리사회학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편의 영화 모두 동물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의 영화가 지니는 우화적인 성질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서 통제된 실험실과도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체제에 순응하거나 체제를 전복하지만, 결국 행위의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울타리 안의 힘없는 개인일 뿐이라는 데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지독히 염세적인 무력감으로 싸늘하다. 동시에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종의 원형(原型)으로 다가오는데(‘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에서는 공통적으로 콜린 파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상황 속에 놓여있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헌데 ‘킬링 디어’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이 특정 시점 이후로 변화한다. 이는 전반부를 장악하는 인물과 후반부를 장악하는 인물 사이의 닮음에서 기인할 뿐더러, 영화를 관통하는 복수의 모티프와 궤를 같이 한다.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은 수술을 집도하는 심장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의 시점으로 개복된 신체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마치 부감 쇼트와 같은 전지적 시점 쇼트로 촬영된 이 기묘한 장면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의사의 손에 그들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영화를 시작하기에 제격인 장면이다. 그렇게 일종의 전지적 능력을 가진 스티븐은 영화 전반부에서는 일종의 신(神)으로 묘사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양상은 뒤집힌다.



’킬링 디어’에 신이 있다면, 그건 스티븐의 실수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스티븐에게 접근한 소년 마틴(배리 케오건)이다. 스티븐은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반면 마틴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이 영화에서 신(神)적 존재란 곧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전지적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인물의 중심축이 옮겨가는 장면은 영문을 모르는 스티븐에게 마틴이 자신의 능력과 계획을 빠르게 설명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이전에, 스티븐을 초대해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도중 마틴은 ‘내가 신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죠?’라는 대사가 등장하자 갑작스레 자리를 뜬다.) 즉, 스티븐과 마틴은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전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서로 닮았지만, 영화 상에서 둘 사이의 닮음이 암시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승承.

영화 상에는 스티븐과 마틴 사이에 다양한 닮음의 양상이 제시되지만,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마틴만이 가진 능력이었다. 먼저 시계가 그렇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 해당하는 수술 장면 이후, 두 명의 의사는 복도를 걸으며 서로의 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티븐은 동료의 가죽 시계줄을 보며 자신은 메탈 시계줄을 더 선호한다고 말했고, 이후 마틴에게 동료의 것과 같은 시계를 메탈 시계줄로 선물한다. 여기서 스티븐과 마틴의 닮음이 성립한다. 그러나 마틴은 자신의 의지로 시계줄을 가죽으로 바꿈으로써, 그들 사이의 닮음을 파괴한다. 반면 상처의 경우는 이러한 양상이 반대로 작용한다. 마틴은 자신을 지하실에 가둔 스티븐의 팔을 물어뜯어 상처를 낸다. 여기서 스티븐과 마틴의 닮음이 파괴된다. 그러나 그 직후, 마틴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팔을 물어뜯음으로써, 그들 사이의 닮음을 재차 성립한다. 이 두 사건 속에서 스티븐은 마틴과는 달리 철저하게 무력하다.



마틴은 이와 마찬가지로 스티븐의 가족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단계와 순서 역시 통제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밥(서니 설직)이 쓰러진 순간부터 마틴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어서 킴(래피 캐시디) 역시 같은 순서를 밟게 되자, 가족들이 동일한 운명 속에 놓였다는 사실이 비로소 명확해진다. (영화 속에서 킴이 이피게네이아 비극을 훌륭하게 재해석해서 높은 점수를 받았듯) 이 영화는 이피게네이아 비극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상술했듯 마틴을 신적 존재로 가정한다면 ‘킬링 디어’는 신의 노여움을 산 스티븐의 가족 중 누구를 제물로 바칠 것인지에 대한 신화적 속성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제물이 될 존재가 이미 정해져 있는 신화와는 달리, ‘킬링 디어’에서 이는 게임의 양상을 띤다. 제물이 된 이피게네이아가 사슴으로 변하는 신화와는 달리, ‘킬링 디어’에서는 그러한 전개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복수의 발단이 되는 (마틴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극중 직접 언급되듯)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틴이 스티븐의 가족을 복수의 대상으로 골랐다는 점이다. 실로 기괴한 이 죽음의 게임에서는 철저하게 단계가 지켜진다. 먼저 사지가 마비될 것, 음식을 거부할 것, 눈에서 핏물이 흐를 것, 그리고 곧이어 죽음을 맞이할 것. 그리고 그 단계를 밟아가는 동안 스티븐과 그의 가족은 한 명의 희생양을 고를 것을 강요받게 된다.



전轉.

이렇게 신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집중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며, 이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훌륭한 각본을 통해) ‘킬링 디어’의 윤리사회학 실험실과도 같은 구조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족 중 단 한 명이 마틴이 행하는 복수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각 인물들이 이에 대응하는 양상이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극중 마틴은 스티븐의 가족들을 차례대로 한 명씩 만나는데, 마틴을 개인적으로 만난 이후에야 게임의 정체를 알게 된 인물들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인 선택을 한다.



이는 킴과 밥이 대화하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킴이 밥에게 자신은 마틴과 함께 떠날 것이라고 말하자, 밥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갑자기 다음 달에 자신의 피아노가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킴은 만약 네가 죽게 된다면 자신에게 MP3를 달라고 부탁한다. 언뜻 보면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 세 마디의 대사는 모두 ‘자신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기묘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편, 밥은 스티븐이 원했던 대로 머리를 자른 뒤 심장전문의가 되겠다며 절박하게 말하고, 안나(니콜 키드먼)는 마지막 순간 스티븐이 좋아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겠다고 말하며, 킴은 마지막 순간 자신이 희생할 것이며 자신이 스티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역설하기까지 한다. 이는 모두 스티븐이 자신을 제물로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편 안나는 마틴에게 고개를 숙여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지하실에 감금된 마틴을 풀어준다. 스티븐은 심지어 킴과 밥이 다니는 학교에 찾아가, 두 아이 중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고를 것인지를 선생님에게 묻기까지 한다. 이 모든 장면들은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렴하고 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칠 것인가. 스티븐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잔인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고, 가족들은 자신이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처절한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희생양이 정해지는 것은 가족들을 묶어 놓은 뒤 모자를 뒤집어 쓴 스티븐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작위로 겨눈 총구에 의해서였다. 누구를 제물로 바칠 것인지가 마치 러시안 룰렛과도 같은 방식으로 정해지는 이 소름끼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이피게네이아 신화를 차용한 뒤 재구성한 결과물인 동시에 그 자체로 염세적 시선이 가득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를 압축한다 하겠다. 제물로 바쳐질 인물이 선택되는 과정에서는 결국 안나도, 킴도, 밥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장총을 손에 쥐었음에도 스티븐 역시 눈을 가렸기에 어떠한 결정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전지적 존재인 마틴 역시 이 선택의 순간에는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한 가족에게 기괴한 형태의 파국이 닥쳐오고 있음에도 그 파국을 야기할 방아쇠의 방향을 그 누구도 전혀 가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세계의 집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結.

그 죽음의 게임에서 제물로 결정된 것은 밥이었다. 그렇다면, 스티븐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임으로써 균형을 맞추겠다는 마틴의 끔찍한 복수는 이로써 성공한 걸까. 피를 흘리며 죽은 밥의 모습을 비춘 뒤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남은 가족들과 마틴은 (스티븐과 마틴이 영화의 첫 부분에서 만났던 것과 동일한) 식당에서 조우한다.


이전에 이 식당에서 스티븐을 만난 적 있었던 마틴은, 당시에 감자튀김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아껴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킴은 감자튀김에 케첩을 뿌려 가장 먼저 먹는다. 이전에 밥은 마틴보다 스티븐에게 훨씬 더 털이 많다며, 덥수룩한 수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스티븐의 수염은 깎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전에 안나는 스티븐에게 두 아이 중 한 명을 선택할 것을 권유하며 아이는 새로 낳을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감자튀김을 마지막에 먹는다는) 마틴의 선호는 관철되지 못했고, (체모의 양으로 상징되는) 기이한 권력의 위계는 역전되지 못했으며, (스티븐과 안나의 결합으로 형성된) 가족은 붕괴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마틴의 복수를 통해서 ‘죽은 이의 숫자’라는 균형은 맞춰졌을지언정, ‘가족의 모습’은 여전히 유지된 상태였다. 바꾸어 말하면, 마틴의 복수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비추어지는 마틴의 얼굴에는 어렴풋한 패배감이 드러난다. 스파게티를 포크로 둘둘 만 뒤 입 속으로 쑤셔넣는 자신만의 식사법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마틴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세상 모두가 그런 식으로 스파게티를 먹는다는 ‘닮음의 역설’에 이미 크게 분노한 적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스티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밥을 죽임으로써 그는 두 가족 사이에 닮음의 양상을 만들었지만, 그 복수 뒤에 남겨진 것은 여전히 건재하게 식당에 자리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죽음으로 생겨난 빈 자리를 이와 닮은 또 다른 죽음으로 메울 수 없었던 마틴의 공허한 비극은, 복수가 끝난 뒤에도 남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 속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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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dir. 요르고스 란티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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