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이 하나의 질문이 여운으로 남아 맴돌곤 했다. 그가 줄곧 다루어왔던 ‘가족’에 대한 영화적 고찰은, 그의 신작 ‘어느 가족’에 이르러 하나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하나같이 따스한 화법을 가진 동시에 일본이라는 특수한 사회를 날카롭게 묘사하곤 했고, 이야기는 결국 가족이라는 하나의 구심점 속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건 사실 가족영화가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원더풀 라이프’의 메타영화, ‘하나’의 시대극, ‘세 번째 살인’의 법정추리물 등의 작품들 역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가 싶다가도 종국에는 결국 가족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그의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가족의 모습을 정의해야 한다면, ‘어느 가족’의 가족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특징적인 가족의 일화를 보편적인 가족의 속성으로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렇다. (그런 면에서, 다소의 의역이 들어간 이 영화의 국내 제목인 ‘어느 가족’은 참 좋은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느 가족’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예술가가 천착해 온 가족영화의 정수(精髓)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사실 ‘어느 가족’은 언뜻 보아도 이제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들어온 다른 가족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가족의 이야기를 뭉근한 화법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의 (특히나 최근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도’ 등의) 영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직설적인 묘사와 가감없는 비판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일본어 원제인 ‘万引き家族’ 혹은 인터내셔널 타이틀인 ‘Shoplifters’에서 알 수 있듯) ‘어느 가족’은 좀도둑질로 살아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행위를 통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형성한 이들의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과연 어떻게 다루는가. 그는 관습적으로 규정된 가족의 정의로 본다면 전혀 가족스럽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가족이라는 틀 아래 그려냄으로써, 그의 영화가 언제나 던져왔던 가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가장 진솔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는 하츠에(키키 키린)를 중심으로 모인 6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이 영화에서 가족들의 집은 하츠에가 독신으로 거주한다고 등록된 집이며, 그들은 하츠에의 성인 시바타를 사용하고 있다). 그 가족에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그리고 그들이 주차장에서 발견한 소년 쇼타(죠 카이리)가 있으며, 하츠에의 전남편의 손녀인 아키(마츠오카 미유)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오사무와 쇼타가 도둑질을 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데려온 어린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가 합류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시작 부분에서 가족들을 묘사하는 양상이다. ‘어느 가족’은 슈퍼마켓에 도둑질을 하러 나타난 쇼타와 오사무를 비추며 시작되는데,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난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유리를 (다시) 발견한다. 유리에게 고로케를 권하는 오사무의 대사 직후에야 좁은 집에서 다같이 저녁을 먹는 가족의 모습이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이때 유리는 이미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 마냥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 (즉, 이 영화에서 가족은 처음부터 6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영화는 새롭게 가족의 구성원으로 편입된 누군가의 존재를 영화의 발단에 제시하면서도 그 구성원이 기존의 가족에 합류하는 과정을 다루는 데에는 전혀 방점을 두고 있지 않다.
떠올려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가족 중 누군가가 떠나거나, 기존의 가족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형태로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유리가 가족으로 새롭게 합류하는 사건이 이야기의 시작점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가족’에서 유리가 합류하기 전 5인 가족은 그 누구도 직접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유리가 가족이 된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루어질 뿐더러 혈연이 아닌 관계로 묶인 여섯 명의 모습을 처음부터 (‘가족’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어느 가족’이 말하고자 하는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답변이다. 극중 유리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는데, 유리(혹은 뉴스에 나오듯 쥬리)가 선택된 이름이라면, 린은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다. 유리는 아키에게 ‘린이 더 좋아’라며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선택한다. 말인즉슨, ‘어느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자동적으로) 선택된 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선택한 자들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극중 노부요는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아?’라고 넌지시 묻는다. 여기서 강한 것은 유대(絆きずな)이다. 그러니까 혈연을 통해 맺어진 가족의 형태보다는 선택을 통해 맺어진 가족의 형태가 더 끈끈하게 유대한다고 노부요는 믿는다. 이는 곧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믿음이기도 할 것이다.
극중 쇼타가 언급하는 ‘스위미 이야기’ 역시 그 맥락을 함께 한다. 작은 물고기들이 한데 모여 커다란 물고기를 물리친다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어느 가족’의 중요한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극중 참치로 상징되는 커다란 물고기는 일본 사회일 것이다.) ‘왜 참치일까’라는 쇼타의 질문에, 오사무는 ‘참치가 맛있으니까, 요즘 참치를 통 못 먹었네’라고 동문서답한다. 그러나 사실 이건 동문서답이 아니다. ‘맛있지만 요즘 들어 먹지 못한’ 참치는, 오사무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했던 어떤 가족상(象)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쇼타에게 계속 아빠라고 불러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오사무가 바라는 ‘참치’라는 이상은 사실 이 영화의 가족상과는 제법 다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스위미 이야기’라는 우화를 통해 일본의 특수한 사회적 관습(혹은, 커다란 물고기인 참치)을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은유한다.
영화의 중반부, 함께 마루에 걸터앉은 6명의 가족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들리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때, ‘어느 가족’에서 유일하게 부감 쇼트가 사용된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멀지만 이 쇼트 속에 담긴 감정은 어느 때보다 진하다. 모두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들은 한데 모여있다. 그건 (노부요가 말했던) 선택한 자들의 유대인 동시에, (쇼타가 말했던) 작은 물고기들의 협력일 것이다.
그렇게 ‘훔치는 이들’, 동시에 ‘소외된 이들’이라는 정체성을 성립하며 가족으로서의 틀을 굳건히 다져가는가 싶던 시바타 가족의 끈은, 하츠에의 죽음을 계기로 헐거워지기 시작한다.
노부요와 쇼타는 함께 길을 걸으며 도둑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사무는 이전에 쇼타에게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노부요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게가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훔치면 되지 않을까’라고 장난스레 응수한다. 그러나 그 직후, 쇼타는 오사무가 진열된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일 것이 분명한 자동차 안의 지갑을 훔치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이 이따금 물건을 훔치던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보고 망했다고 착각한다(가게에는 분명 상중忌中이라는 공지가 붙어있었지만, 쇼타는 그 한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사무와 노부요의 논리를 나란히 정면으로 배격하는 이 두 사건과 동시에, 쇼타에게 도둑질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쇼타는 린이 도둑질을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말리려 하지만 린은 기어코 물건을 훔치려 한다. 그 순간 쇼타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전에 도둑질을 들켰지만 오히려 간식 두 개를 나누어주며, 여동생에게는 그런 일을 시키지 말라고 타일렀던 가게 할아버지의 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쇼타는 그 순간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기 위해 물건을 일부러 훔치고 붙잡힌다. 그리고 쇼타가 붙잡힌 것을 계기로, 가족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자 역설적으로 가족 간의 관계가 도마에 오른다. 생각해보면 하츠에를 할머니라고 불렀을 뿐, 가족들은 서로를 변변한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노부요와 쇼타는 그들의 호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쇼타는 오사무가 자신을 계속 아빠라고 부를 것을 바란다며, 노부요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당시 노부요는 ‘불려 봐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노부요를 취조하는 형사는, 쇼타는 당신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라고 묻는다. 그 순간 노부요가 눈물을 터뜨린 것은 쇼타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쇼타가 자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부르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복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글쎄요, 어떻게 불렀을까요, 그녀는 반복해서 되뇌인다. 노부요는 자신이 선택한 가족이야말로 더 강한 유대를 지닌다고 믿고 있었지만, 쇼타는 사실 자신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노부요와 오사무가 옛날에 도둑질을 하던 도중 차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소년이 쇼타였던 것 뿐이니까.
그래서 이후 등장하는 면회 장면에서, 노부요는 쇼타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 노부요와 오사무가 쇼타를 발견한 장소가 어느 주차장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차종 안이었는지. 그녀는 선택한 가족이 더 유대가 깊다고 믿고 있었고, 취조를 받던 순간 쇼타는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된 것이었다는 간단한 사실을 새삼스레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쇼타에게 부모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줌으로써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날 밤 오사무는, 이제 아빠는 아저씨로 돌아갈게, 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나 다음 날, 헤어진 뒤에도 버스에 탄 자신을 보내지 못하고 따라오는 오사무를 보며 쇼타는 처음으로 아빠라는 호칭을 입모양으로나마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쇼타는 그 순간 비로소 자신의 가족을 선택했다. (시바타라는 성을 가지고, 하츠에의 명의로 된 집에서) 가족으로 존재하던 이들의 표면적인 ‘형체’가 무너진 이후에야, 쇼타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간 린의 모습이다. 하츠에가 가르쳐 준 적 있었던 숫자놀이를 하던 린은 고개를 내밀어 난간 너머를 응시하고, 그 순간 ‘어느 가족’은 돌연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대어져 있는 이 장면과 (오사무와 쇼타가 등장하는) 그 직전 장면이, 영화의 처음에도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오사무와 쇼타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난간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린을 발견했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오사무와 쇼타가 등장하지만, 이제 그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린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린은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처럼 난간 사이에 숨어있는 대신에,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 세상을 응시한다. 린이 잠시 머물렀던 가족은 이제 없지만, 쇼타가 자신의 가족을 비로소 선택했듯 린 역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이 영화는 린을 비추는 마지막 쇼트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한없이 내려앉은 현실을 통해 더없이 아스라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어느 가족’의 마지막 순간은, 그래서 좀처럼 잊기 힘들 여운을 남긴다.
혈연이 아닌 인연 역시 가족을 가족으로 만든다.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때 가족의 유대는 더욱 깊어진다. 이 영화 속의 가족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러한 가족관(觀)이 배어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장편 극영화로 데뷔한 1995년 ‘환상의 빛’ 이래 23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고찰과 상념을 ‘어느 가족’ 속에 모두 한데 아울러 담아냈다. ‘어느 가족’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세계가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공존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반복할 필요가 있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영화의 정수(精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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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 Shoplifters (万引き家族, 2018)
dir. 고레에다 히로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