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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12. 2018

그 아이는 눈을 가리고 있었다, '주피터스 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소 과시적인 촬영 테크닉이 여러 장면에 걸쳐 전용되고 있으며, 다소 직설적인 종교적 상징이 영화 전반에 걸쳐 과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주피터스 문’에는 빙 에두르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나 강력한 영화적 에너지로 표현해낼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 눈에 밟히는 단점을 초월하는 흥미로운 담론이 담겨있는 헝가리 출신 코르넬 문드럭초의 일곱 번째 장편 ‘주피터스 문’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주피터스 문(Jupiter Holdja)’이 수없이 많은 목성의 위성들 중에서도 에우로파(Europa)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명확하게 제시된다. 유럽 세계가 직면한 난민 문제를 비현실적 장르물의 작법으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가 제목에서부터 유럽을 직접적으로 환기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코르넬 문드럭초의 전작 ‘화이트 갓’이 유기견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교묘한 장르적 터치를 통해 그려냈던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주피터스 문’은 시리아에서 헝가리로 밀입국하던 난민 아리안(좀버 예거)이 경찰의 포위망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도입부터 관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붙들어야 할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는, 물을 건너 들판을 지나 숲 속을 달리는 아리안의 모습을 트래킹으로 담아낸 끝에 그가 라즐로(기오르기 세르하미)의 총에 맞아 쓰러지기까지의 모든 사건을 단 하나의 쇼트에 담아낸 롱테이크 시퀀스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바닥에 쓰러진 아리안이 공중으로 떠올라 부유하는 장면이고, 이 장면 역시 360도 회전 카메라를 사용해서 단 하나의 쇼트로 촬영되어 있다. 이 두 장면을 통해서, ‘주피터스 문’은 인물을 바라보는 동시에 결코 시야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하나의 선언을 한다. 그러니까 이 선언의 의도대로, 우리는 영화 내내 아리안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런데 누구의 시선으로 따라갈 것인가?


그건 가보(메랍 니니트쩨)의 시선이어야 할 것이다. 지독한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영화의 첫 두 장면에 이어지는 것은, 아파트에서 막 잠에서 깨어난 가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때 ‘주피터스 문’은 두 번째 선언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발코니 선반에 앉아있는 고양이와 창틀에 끼어 죽은 무수한 날벌레를 차례로 비춘 뒤, 담배연기를 창 밖으로 내뿜는 가보를 프레임에 담는다. 그 직후에 고양이는 어느새 지붕에 올라가 있고, 가보는 발코니 선반에 널부러진 채 죽은 정체불명의 날개 달린 커다란 벌레를 손바닥에 들고 있다. 유독 ‘떠오른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이 장면 내의 기묘한 소재들은, 앞선 장면과 연결될 때 그 의미가 명징해진다. 앞선 장면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던 아리안은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이 장면에서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떨어진 벌레는 가보의 손바닥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의 시퀀스를 상징적인 측면에서 잇는다면 이 날개 달린 벌레는 아리안이기도 하다. 아리안은 이 시점에서 가보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피터스 문’에서 아리안을 따라가야 한다면 그건 가보의 시선이어야만 한다.



난민에게 뒷돈을 받아 그들을 도와주는 부패한 의사 가보는 총상을 입은 소년이 들어왔다는 제보를 듣고, 그 소년이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우여곡절 끝에 아리안을 확보해서 자신의 물욕을 이루려 든다. (가보가 아리안을 이용하는 방법은 아리안이 마치 종교적 계시를 받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인물 간 권력의 양상은 서서히 역전된다. 지상에서 두 발을 떼고 공중에서 유영할 수 있는 아리안은 계속해서 특별한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한편 ‘아리안’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아리아인을 암시한다. 이처럼 이 영화의 상징적 작법은 매우 도식적이지만 매우 강력하다.) 그러니까 아리안은 범인(凡人)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다. 하늘을 부유하는 그를 부감 쇼트로 비추며 지상의 사람들을 한없이 작게 묘사하는 쇼트에서 그렇고, 아리안을 찾아 헤매던 가보가 그를 옥상에서 발견했을 때 신발끈을 묶어주는 가보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리안의 수직적 위치를 관계짓는 쇼트가 그러하며, ‘두렵다’고 말하는 아리안에게 그의 특별한 지위를 상기시켜주는 가보의 대사가 그렇다(‘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라고 번역된 이 대사는, 영화 속 영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There is no safe place from injuries of His story’이다).


헌데 흥미롭게도 사실 이러한 권력의 역전은 영화 밖에서 바라볼 때도 그렇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에서 극중 설정 상 헝가리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랍 문화권 출신의 난민인) 아리안 뿐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배우의 실제 국적을 따져보면 아리안을 연기한 좀버 예거는 헝가리 출신의 헝가리인이다. 오히려 이 영화 속에서 사실 헝가리 출신이 아닌 배우가 있다면 그건 가보를 연기하는 구 소련 현 그루지야 공화국 출신인 메랍 니니트쩨이다(그래서, 가보의 헝가리어 대사는 모두 다른 배우에 의해 더빙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외부인을 연기하는 것은 내부인이고, 내부인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 스스로가 실제로 밝혔듯 구 소련 시절 사회적 억압을 실제로 경험한) 외부인이다. 이러한 기묘한 역전의 양상이 우연이든 필연이든(물론, 나는 의도적으로 배치된 필연이라 생각한다), 결국 ‘주피터스 문’에서 아리안과 가보 사이의 관계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영화 안팎에서 모두 상징적으로 뒤집히고 있다.



관계가 뒤집혔다는 사실을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변화한 인물은 가보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을 거칠게 수직적으로 분류한다면 (수혜적 위치에 놓인) 아리안은 난민이자 피지배층이고, (시혜적 태도를 지닌) 가보는 구호자이자 지배층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아리안이며(가보는 아리안에게 능력을 발휘해 줄 것을 명령이 아니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권력 역시 아리안의 것임이 분명해진다(아리안이 감자튀김을 찾아낸 호텔 무도회에서 그들이 어떻게 입장할 수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라). 결국 다소 성긴 소재와 뻔한 상징을 통해서라도, 이 영화는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를 뒤바꿈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율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가보는 아리안을 도와주면서 그 이유를 ‘탈출해야 하니까’라고 설명한다. 시리아로부터 헝가리로 온 난민 아리안은 (곤경에 처했을지언정)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데, 대체 그는 왜 목적지를 탈출해야 하는 것이며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걸까. 당연하게도, 해답은 매우 단순하다.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벌어진 소동극의 끝, 막다른 복도에 내몰린 아리안에게 다시금 총구를 겨눈 라즐로를 가보는 또 다른 총구로 막아선다. 가보는 아리안에게 도망치라 말하고, 그 순간 아리안은 지상을 탈출해 허공으로 떠오른다. 라즐로는 총구를 겨눈 채 그를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총구를 내린다. 그리고 땅 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떠 있는 아리안을 올려다본다.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주피터스 문’은 양 손으로 눈을 가린채 숫자를 세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여준다. 40까지 센 뒤 숨바꼭질을 시작하는 그 아이의 눈은 계속 가려져 있고, 결국 그 아이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난다. 그러나 과연 그 아이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걸까. 바로 직전 장면에서 공중으로 떠오른 아리안을 바라보던 가보가 눈을 감고, 영화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눈을 가린 아이가 등장하는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공중을 날다가 지상으로 추락한 아리안과 날개 달린 벌레는 동일시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눈을 감은 가보와 눈을 가린 아이 역시 동일시되어야 한다. 되짚어보면, 이 영화는 시작 부분에서 두 개의 연속된 쇼트를 통해 가보의 시선으로 아리안을 따라갈 것을 선언했었다. 그리고 아리안은 (가보가 바랐던 대로) 혐오와 갈등으로 얼룩진 지상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아리안은 더 이상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가보의 목적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보의 시선은 더 이상 아리안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가보는 눈을 감고, 어린 아이는 눈을 가린다.



영화 상에서 가보와 라즐로는 모두 한 차례씩, 베라(모니카 발자이)에게 인간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떠오르는 것이 가능할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두 차례 모두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지만, 질문 당시에 가보와 라즐로는 이미 아리안의 능력을 목격한 상태였다. 그리고 가보가 영화의 마지막 소동에 휘말리기 전 열어본 포춘쿠키에는, ‘당신은 곧 기적을 목격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베라의 대답처럼) 중력을 거슬러 공중을 부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보의 포춘쿠키처럼) 그들은 기적을 목격했다. 지상을 등지고 공중으로 떠오른 아리안의 마지막 모습은 불가능한 일이 기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주피터스 문’의 영화적 대답은 사실 확고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영화이기에, 현실의 우리는 정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눈을 가린 채 술래였던 그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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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피터스 문 / Jupiter’s Moon (Jupiter Holdja, 2017)

dir. 코르넬 문드럭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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