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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25. 2018

위선적인 자가당착의 유희, '더 스퀘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겉을 훑자니 유쾌한 해프닝인데, 속을 파보니 끝없는 딜레마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작가적 야심이 돋보이는 신작 ‘더 스퀘어’는, 역시나 훌륭했던 그의 전작 ‘포스 마쥬어’보다도 한 발 더 나아간다. 눈 덮인 스키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놀라운 유머 감각으로 다루었던 ‘포스 마쥬어’가 제한된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소품격의 소동극이었다고 한다면, ‘더 스퀘어’는 보다 더 넓은 범위로 뻗어나가 예술과 도덕 그리고 영화라는 추상성 자체를 다루려는 시도로 가득한 부조리극이다. 특히나 루벤 외스틀룬드의 영화만들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풍자라는 요소가 유희에 가깝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 ‘포스 마쥬어’를 통해 다양한 층위에서 활용되던 이러한 극작(劇作)의 태도는 ‘더 스퀘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한 층 더 날카롭고 과감하며 복잡하다. 백인 기득권의 시선에서 백인을 풍자하고, 예술 종사자의 발상으로 예술을 풍자하며, 위선적 군상의 입장에서 위선을 풍자하는 이 자가당착적 유희는 ‘더 스퀘어’가 2017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써 극적으로 완성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 스퀘어’는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영화라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다 녹여내 보려는 루벤 외스틀룬드의 거대한 놀이터처럼 느껴진다.



2.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더 스퀘어’는 영화 안에서는 남미 출신의 예술가에 의해 완성되어 스웨덴 X-로얄 미술관에 전시되기로 한 설치미술이지만, 영화 밖에서는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에 의해 2015년 당시 스웨덴에서 공개된 적 있었던 동일한 컨셉의 설치미술이기도 하다(실제 작품명은 스웨덴어로 ‘더 스퀘어’를 의미하는 ‘Rutan’이었다고 한다). ‘더 스퀘어’는 영화 초반, 작품을 소개하는 인물에 의해 그 상징적인 중요성이 역설된 뒤 미술관 앞마당에 설치된다. 헌데 그 과정에서 미술관 앞마당이라는 대표적인 공간에 전시되던 기마 동상은 철거 도중 무심하게 부수어지고, ‘더 스퀘어’는 창작자의 일절 개입 없이 인부들에 의해 마치 공산품을 찍어내듯 무미건조하게 설치될 뿐이다. 그러니까 이때 예술은 단순히 대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 묘사되며, 그 과정에서 옛 것은 파손되고 새 것은 양산된다. ‘더 스퀘어’의 소개를 통해서 예술(을 통한 도덕적 관념의 향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초반부는, 그 직후 ‘더 스퀘어’의 설치를 통해서는 예술(이 손쉽게 대체되는 세태)의 무위성을 교묘한 방식으로 환기한다. 사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계속 삐걱대는 소음을 자아내는 나무의자 탑 형태의 작품은 인물들이 민감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을 어김없이 방해하고, 청소를 하던 도중 실수로 망가뜨려버린 자갈 더미 형태의 작품은 아무도 몰래 원래 모양대로 돌려놓자고 합의된다. 본래의 의도와 형질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겨버린 예술(들).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3.

예술로 말할 것 같으면, ‘더 스퀘어’의 정언(定言)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돌봄의 성역으로, 이 안에 있는 모두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Rutan är en frizon där tillit och omsorg rader, i den har vi samma rättigheter och skyldighter utan atskillnad)’.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 틀을 만든 뒤 그 가상의 틀 안에서 도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더 스퀘어’의 창작 의도는, 사실 극중 동명의 설치미술 뿐 아니라 ‘더 스퀘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영화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혹은, 적용되어야 한다). 영화라는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 151분 동안 담긴 ‘더 스퀘어’는 과연 신뢰와 돌봄의 성역이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졌는가?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 일 것이다. ‘더 스퀘어’는 극중 크고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더 스퀘어’라는 작품이 주창하는 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황망하게 역설한다.



4.

‘더 스퀘어’의 전시에 관한 회의를 거친 뒤 실제로 ‘더 스퀘어’가 설치된 다음 날 아침, 출근하던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은 광장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람을 맞닥뜨리고, 경황이 없는 와중 소지품들을 도둑맞는다. (이때, 영화의 발단부에서 갈등을 촉매하는 역할을 하는 이 사건이 ‘광장(square)’에서 일어났다는 점과, 스웨덴 감독이 덴마크 배우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원제가 영어 ‘The Square’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직원의 조언에 따라, 잃어버린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한 결과 알아낸 아파트에 일종의 경고문을 돌린다. 헌데 소지품 중에서 커프 링크스는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발견했고, 휴대폰과 지갑은 경고문을 돌린 다음 편의점에 맡겨져 있다. 이때까지 관객은 ‘크리스티안의 소지품을 훔쳐간’ 익명의 도둑에 대해 크리스티안과 동일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커프 링크스를 도둑맞았다고 착각한 크리스티안의 실수 그리고 다른 소지품들이 무사히 돌아온 기이한 사건 이후에는 그 입장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결국 크리스티안이 도둑맞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영화 속의 특정한 의견에 무게를 실을 즈음 사건의 양상을 정반대로 뒤집어버림으로써, ‘더 스퀘어’를 보는 관객들이 그들 스스로 이 딜레마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도록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그건 길거리에서 적선을 부탁하는 거지들의 경우에도, 사회적인 취약 계층을 이용해 홍보영상을 만든 대행업체 직원들의 경우에도,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 자신의 이름을 묻는 앤(엘리자베스 모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더 스퀘어’는 이야기의 전모를 크리스티안의 입장에서 따라갈 것을 교묘하게 유도한 뒤에 사건의 양상을 단박에 뒤집어버림으로써, 관객들을 (그리고 나아가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 본인 역시) 자가당착의 모순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렇다면,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5.

도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더 스퀘어’는 위선으로 가득하다. 크리스티안은 극 초반, ‘더 스퀘어’를 소개하는 연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치 실수를 가장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설 역시 완벽하게 의도적으로 연습한다. 사실, 자유자재로 뻗어가는 블랙코미디를 표방하면서도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더 스퀘어’라는 설치미술을 통해 주창하는 도덕적 가치를 ‘더 스퀘어’라는 영화는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위선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기분열적인 모순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위선은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난과 조롱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이유인즉슨, ‘더 스퀘어’는 인간이 (혹은 나아가 예술이) 태생적으로 얼마나 위선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훌륭하게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유투브에 업로드된 문제의 홍보영상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거세지자, 크리스티안은 전시 주최 측의 책임자로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 의사를 밝힌다. 이때 객석에서 두 가지의 질문이 연달아 등장한다. 첫 번째 질문은 ‘연대’의 정신이 어디로 갔냐는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를 이용해서 전시를 홍보할 파렴치한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냐는) 비판적인 질문이고,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어떤 영상을 만들든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냐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다. 이 두 질문은 각자의 의견을 확실하게 표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 대척점에 선 양립 불가능한 질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질문을 마주한 크리스티안은 문제의 핵심에 전혀 다가가지 못하고 겉을 맴돌듯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더 스퀘어’라는 설치미술과 ’더 스퀘어’라는 영화가 그랬듯이 크리스티안 역시 위선적인 존재 그 자체였기에.



7.

크리스티안의 위기는 자신이 경고문을 돌렸던 아파트에서 예상 밖의 피해자가 발생하자 더욱 극으로 치닫는다. 크리스티안이 경고문을 돌린 탓에 자신이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소년은 크리스티안을 직접 찾아오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애써 변호하지만 막무가내로 외치는 소년에게 짜증섞인 말을 던지며 실수로 그를 밀쳐낸다. 소년이 (아마도) 돌아간 뒤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티안은 마치 환청처럼 계속해서 소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크리스티안은 그에게 영상편지를 남기지만, 결국 진솔한 사과의 말로 시작하는가 싶었던 그 이야기는 계급도, 머리색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무지와 편견에서 나온 위선으로 가득한 말일 뿐이었다. 이 장면 바로 직전에, 소년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결국 쓰레기더미까지 뒤져야 하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을 ‘더 스퀘어’는 부감 쇼트로 멀찍이 잡아내고 있다. 크리스티안을 마치 쓰레기더미의 일부인 것처럼 담아낸 이 조소적인 프레임 속에서 그는 어떻게 취급되는가, 그리고 이 직설적인 장면을 통해 ‘더 스퀘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8.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영상편지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직접 사과하러 간 크리스티안과 그의 어린 두 딸은 결국 그 소년을 만나지 못한다. 얄팍한 도덕을 내세웠던 그의 가치관은, ‘더 스퀘어’라는 피상적 예술을 적극적으로도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겨있(어야 했)던 정언의 가치를 결코 품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크리스티안과 거의 모든 측면에서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도록 짜여진 소년의 캐릭터야말로, 이 영화에서 근본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위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하겠다. 결국 소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크리스티안의 어린 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여러 측면에서 ‘포스 마쥬어’에 등장하는 가족 속 아빠와 딸을 닮아있다.) 그건 자신의 위선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를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정당화하고 싶어도 그럴 길 없는 지독한 무력감을 마주한 크리스티안의 부끄러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술에 종사하는 기득권적 위치에 놓인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지점에서, 그 부끄러움이란 결국 ‘더 스퀘어’를 만든 창작자 루벤 외스틀룬드의 것이다.) 생각해보면 고개를 숙인 인물의 모습은 이미 ‘더 스퀘어’에서 한 차례 다루어진 적이 있었다. 그건 연회장에서 일종의 이벤트로 준비되었던 행사가 예상 외로 과격하게 전개되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신 제각기 고개를 숙인 채 이 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던 행사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연회장 안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해프닝에 고개를 푹 숙인 군상들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위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그리고 예술은) 하나같이 위선적이라는 것, ‘더 스퀘어’가 다루고 있는가 싶었던 거대한 종류의 담론은 결국 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9.

‘더 스퀘어는 신뢰와 돌봄의 성역으로, 이 안에 있는 모두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영화 초반에 제시되었던 ‘더 스퀘어’의 창작 의도를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다시 한 번 환기해보면 퍽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더 스퀘어’라는 가상의 사각형 속 도덕적 책무는 실제의 사각형에 표상된 예술적 형태에 의해 비판적으로 환기되었고, 이는 또다시 프레임의 사각형에 투사된 영화적 양식 안에서 그 무위성이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사각형(‘더 스퀘어’)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통해 도덕과 예술과 영화가 지니는 양면성 그리고 그 안에서 고투하는 본질적인 위선의 실체를 이렇게나 진진하게 다루어 낸 ‘더 스퀘어’는 루벤 외스틀룬드의 작가적 야심 그 자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위선과 그 위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인간의 위선이라는 상호적 관계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역설일 것이다. A를 비판하는 존재 역시 생각해보면 A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역설은 얼마나 회귀적이고 허망한가. 이 영화에서 기득권성을 비판하는 크리스티안이 그렇고, 크리스티안의 기득권성을 비판하는 루벤 외스틀룬드가 그렇다. 바로 여기에 ‘더 스퀘어’의 역점이 놓여있다. (영화예술) ‘더 스퀘어’를 통해 (설치미술) ‘더 스퀘어’를 비판하는 이 영화의 자기부정적 플롯은, 위선적인 군상을 통해 또 다른 위선적인 군상을 비판하는 자가당착적 구조를 택함으로써 형식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완성된다. 앞서 ‘더 스퀘어’가 루벤 외스틀룬드의 거대한 놀이터처럼 느껴진다고 이야기한 적 있었다. 위선적인 자가당착의 유희가 횡행하는 이 놀이터가 만약에 실재한다면, 그 형태는 아마도 정방사각형이 아닐까.


-

더 스퀘어 (The Square, 2017)

dir. 루벤 외스틀룬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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