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Nov 16. 2018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오는 구원,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때때로 과거의 기억은 예고도 없이 현재의 삶에 불쑥 끼어들곤 한다. 기억이란 대부분 과장되거나 희석되기 마련이지만, 애써보아도 희석되지 않는 과거 역시 분명히 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과거는 현재에 지독하게 파고들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린 램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속 주인공 조(호아킨 피닉스)의 기억이 바로 그렇다.



2.

린 램지가 2011년작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두 가지 시점의 이야기는 줄곧 겹쳐진다. 문득 회상되는 과거와 길게 서술되는 현재 사이에서, 인물들은 적확한 도식 아래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 현재의 이야기 사이로 간혹 짧게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피해자는 어머니, 가해자는 아버지였으며, 힘이 없었던 어린 조는 방관자였다. 그렇게 난입하는 과거로 인해 흔들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피해자는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 가해자는 주지사이며, 방관자는 여전히 현재의 조 자신이다.


3.

조는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상태로 묘사되지만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어린 조는 폭력을 뻔히 목격하면서도 이를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으며, 현재의 조는 주도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국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사건에 휘둘리게 되는 처연한 존재이다. 매춘굴에서 니나를 구해냈다고 생각했던 직후 조는 예상치도 못했던 해프닝으로 결국 니나를 놓칠 수밖에 없었고, 사건이 일파만파 커진 뒤 돌아간 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도 못한다. 니나가 자신의 눈앞에서 납치되어 사라진데다 이미 살해당한 어머니를 발견한 직후에도, 그는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일 확률이 절반이나 되는 침입자에게) 복수하는 대신 나란히 누워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읊조린다. (이때 그들이 따라부르는 노래가 전적으로 어머니의 시점에서 쓰여진 'I've Never Been to Me'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장면은 기묘하게 뭉클하기까지 하다.)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도 노래가락을 읊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조는 어찌나 무력한가.



4.

앞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속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겹쳐진다는 점을 언급했다. 선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플롯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마치 유사한 행위를 통해 점화되는 것만 같은 플래시백의 형태로) 나란히 제시된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매듭이기도 하다. 결국 두 가지 시간대를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라는 인물의 도식을 교묘하게 연결짓고 있는 이 영화는 극중 현재에 불현듯 스쳐가는 과거를 통해 그 시차를 좁히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동인(動因)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무력한 방관자인 조이다. 사실 이 영화에는 총 세 가지 시점의 플래시백이 존재하지만, 그 중 실제로 조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 앞선 시간대의 시점 뿐이다. 허나, (조의 경험인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두 시점에서도 조는 철저하게 방관자로만 기능한다. 총을 맞고 꿈틀대다 이내 죽어가는 이를, 혹은 트럭에 갇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조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방관자로서의 정체성은 조에게 죄책감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기고, 그 트라우마는 현재에 이르러 환상과 환청의 형태로 발현된다.


5.

조는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다. 니나를 찾으러 갔던 건물에서 흘러나오던 음악('Angel Baby')은 영화의 후반부 주지사의 저택에서도 동일하게 흘러나온다. 영화 내내 신경을 긁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만 같은 조니 그린우드의 뛰어난 음악 역시 조에게로만 날아든다. 이건 조에게만 들리는 환청이다. 한편 그는 물 속에 어머니를 수장한 뒤에는 가라앉는 니나의 모습을, 저택에서 죽은 주지사를 발견한 뒤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어머니와 수건을 뒤집어 쓴 자신의 모습을 차례대로 본다. 니나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주지사를 하나의 공간 속에 욱여넣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중반, 사진을 찍어달라는 한 무리의 요청에 조는 카메라를 들지만 클로즈-업되는 것은 공포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게 크게 벌린 입 모양 뿐이다. 그 직후, 조에게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한 여자는 눈물을 글썽인다. 이건 조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 그러니까 조는 환청과 환상을 통해 자신이 인지하는 사건의 양상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는 분절된 채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전지적 시점의 영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매춘굴 그리고 주지사의 저택에서 보는 CCTV 등의 영상은 그 곳에 잠입하는 조가 그 시공간을 인지하는 양상이기도 하다.) 그의 얼룩진 과거는 분절된 현재로 끊임없이 파고든다.



6.

과거의 조와 현재의 니나는 반복적으로 숫자를 센다. 멋대로 나뉘어 제시되는 일련의 숫자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것 같지만 사실은 1이 되는 순간을 향해 수렴한다. 그 숫자가 1이 되는 영화 속 유일한 순간, 니나는 자신을 구하러 온 조의 존재를 자각했다. 그 순간 (1을 말함으로써 마침내 카운트다운을 끝내는) 니나라는 현재와 (계속 숫자를 세지만 카운트다운을 끝낼 수 없었던) 조라는 과거는 하나가 되고, 이것이야말로 조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의 적극적인 행동이 그가 의도했던 목표를 달성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번번히 어긋나거나 실패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결말을 우선적으로 되짚어보면,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로부터 촉발된 조의 기묘한 죄책감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 내내 사건을 이끌어가고 행위를 주도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는 결코 구원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조는 어디까지나 구원의 객체였다.


7.

조는 니나를 구하려는 목적 하에 움직이지만, 결국 니나를 본질적으로 구해내지는 못한다. 그가 위험으로부터 니나를 구해낸 직후 니나는 더 큰 위험에 빠지며, 주지사의 저택에서 니나를 구해내는 것은 주지사의 목을 나이프로 그어버린 니나 자신이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주지사를 발견한 조는 허망한 웃음을 터뜨린 뒤, '나는 나약해'라고 흐느끼며 웃옷을 벗는다. 그 순간 그는 웃옷을 입지 않은 채 두려움에 떨던 어린 자신의 모습과 교묘하게 겹쳐지며,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죄쵁감에 휩싸인 채 과거의 방관자로 회귀한다. 그런데 니나는 그런 조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이 괜찮은 것인가.


8.

이때 괜찮아야 하는 것은 조의 과거이자 현재이다. 조의 과거 속에서 방관자였던 그는 피해자였던 어머니를 돕지 못했지만, 조의 현재 속에서 피해자였던 니나는 스스로를 구해낸다. 비록 조는 여전히 방관자로 남을지라도, 니나는 자신을 구해냄으로써 조에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구원의 객체에서 주체가 된 니나의 위로는, 이 저택에 오기 직전 (과거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조에게 상징적 의미로 다가온다. 구원의 주체에서 객체가 된 조는 니나에게 위로받은 그 순간 과거와 현재를 잇는 방관자로서의 정체성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니까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촉발된 현재의 고통을 구원해주는 것은 니나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니나는 '날씨가 좋다’며 어딘가로 떠날 것을 제안하고, 그들은 그대로 증발한다. 영화가 끝나자, 니나와 조가 잠시 전까지 앉아있었던 자리에는 마시다 만 유리컵들만이 남겨진다.



9.

이때 이 영화의 제목을 새삼스레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린 램지는 전작에 이어서 하나의 문장을 영화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그 문장인즉슨 '너는 사실 여기에 없었다(You Were Never Really Here)'이다. 이 명제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조의 존재를 구원해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이 영화는 두 명의 주인공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끝맺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는 '여기'라는 직시적 표현에 드러나는 불특정한 장소 속 '너'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구원하려 하는 것만 같다. 특정되지 않은 장소 '여기' 그리고 특정되지 않은 지시체 '너'는 발화의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다. 과거의 시점에서 '여기'는 조의 집이었고, 현재의 시점에서 '여기'는 조가 지나치는 모든 곳이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조가 존재했던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를 결코(never) 부정하고 만다. 그러니까 조는 영화가 시작되던 순간에도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택시 기사의 입모양처럼) 그 곳에 없었고, 영화가 끝나던 순간에도 (권총을 턱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그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처럼) 그 곳에 없었다. 조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은 소년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가 하면, 매번 용건을 말한 뒤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데다 그냥 보통 사람처럼 연락하면 안되겠냐는 고용주의 말을 얼버무린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이 인식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통제하려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조는 존재하고 싶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은 (‘너’와 ‘여기’라는 맥락의존적 표현 속에 담긴) 조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려 한다.



0.

그러니까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구원의 근원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앞서 제시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보자.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구원은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조를 살아가고 행동하게 만드는, 되풀이되는 기억 속 희석되지 않는 그의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를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니나가 조에게서 방관자의 정체성을 벗겨내자, 비로소 조는 존재하지 않을 자격을 부여받는다. 식당에 마주보고 앉은 그들이 사라지던 순간, 내내 어둡던 영화의 톤과 달리 이 장면은 유달리 밝다. 조가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여 따라불렀던 노래 속 ‘진정한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I’ve never been to me)’라는 곡조가 유달리 구슬프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를 무렵, 그는 비로소 존재로서의 자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없애준 니나와 함께 존재를 지우고 사라진다. 그렇게, 조에게 구원의 순간은 환한 빛처럼 찾아온다.


-

너는 여기에 없었다 (You Were Never Really Here, 2017)

dir. 린 램지

★★★★

매거진의 이전글 위선적인 자가당착의 유희, '더 스퀘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