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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24. 2018

필름 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 '필름스타 인 리버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매듭짓는 필름자욱처럼, 남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작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아네트 베닝)의 삶 중에서도 피터 터너(제이미 벨)와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을 다루며 인물에 대한 존중을 표하려는 영화. 형식적으로는 과거에 천착하면서도, 황금기를 반추하는 대신 황혼기를 직시하며 그 순간을 오롯이 맞이할 줄 아는 작품. 현재(라는 현실)와 과거(라는 영화)를 매끄럽게 연결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도, 필름(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로 켜켜이 쌓아낸 영화.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라는 원제처럼, 이건 스러지는 대신 살아남아 회자될 이야기가 된다. 섬세한 결과 아련한 향을 지닌 멜로드라마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인물에 스며든 채 반짝이는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의 호연과 더불어, 다소 갸우뚱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폴 맥기건의 최고작이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영화는 리버풀로 돌아온 글로리아로부터 시작된다. 연극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분장을 가다듬던 그녀는 분장실 바닥에 돌연 쓰러지고 만다. 그녀를 비추던 카메라의 시점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리버풀에 살고 있는 피터에게로 옮겨간다. 연극 무대에 오른 뒤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온 그는 글로리아가 입원해 있다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연극에 출연하고 있는) 두 명의 배우를 영화의 서두에 소개하면서도, 연극이 시작하기 전의 글로리아와 연극이 끝난 후의 피터를 보여줄 뿐 ‘연극’도,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영화는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연극 무대에 오르는 순간을 괄호치며 시작한다.


배우의 커리어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낙하하며 시작한다. 글로리아는 전성기를 누렸던 헐리우드 시절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리버풀로 돌아왔고, 피터는 글로리아와 함께 했던 헐리우드에서의 순간들을 뒤로 한 채 리버풀로 돌아왔다. (황금기, 혹은 헐리우드라는) 과거를 떠나온 글로리아와 피터는 (황혼기, 혹은 리버풀이라는) 현재에서 마침내 조우하지만, 관객들은 이전에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과거를 회술하기 위해 영화는 직접 과거로 향한다. 둘의 추억이 담긴 글로리아의 구두를 매만지던 피터는 방을 나서고, 그런 그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쇼트의 전환 없이 과거에 그들이 살았던 아파트로 시공간을 옮긴다.


그렇게 이 영화는 하나로 연결된 쇼트 안에 현재와 과거를 매끄럽게 이어서 담아내는 과감한 연출법을 택하고 있다. 그 구성은 항상 과거가 현재에 안긴 액자식 구조로 짜여져 있으며, 시공간을 이동시키는 것은 오롯이 피터의 몫이다(이 영화는 피터 터너가 쓴 회고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피터가 떠올리는 글로리아의 이야기다. 현재의 피터가 떠올리는 과거의 조각을 통해 기억을 소환해내는 이 영화에서, 결국 회상이 끝나면 현재로 돌아와야만 한다. 환상에 젖은 과거로 도망치더라도 상념에 잠긴 현재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귀환의 정서는, 결국 이 씁쓸한 이야기의 분위기를 교묘하게 환기한다.



한편 이 영화는 연극을 보여주지 않은 채 연극의 앞과 뒤만을 제시하며 시작된다고 언급했었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에서 연극, 그러니까 배우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그 순간은 오히려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2년 전 글로리아와 피터가 이야기한 적 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1막 5장을 그들이 현재 리버풀의 연극 무대 위에서 나직이 읊조리는 그 순간, 영화 초반에 괄호친 채로 남아있던 그들의 정점은 비로소 영화에 아로새겨진다. 아마 그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인물에 대한, 그리고 인물에 의한 영화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해보자면,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인물(들)이 추억하는 시대의 향수에 관한 영화다. 이때 그 시대는 결국 필름 영화의 시대, 그리고 그 필름 속에 살았던 이들(혹은, ‘필름스타’)의 사랑이 꽃피던 시대일 것이다. 시대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것이 곧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그래서 헌사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서술의 주체가 되는 피터 터너가 글로리아 그레이엄에게 바치는 헌사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피터 터너가 카메오로 등장하는 영화의 후반부 무대 장면은 더없이 뭉클하다.) 애달픈 멜로의 섬세한 결과 두근거리는 로맨스의 아련한 향이 감도는 이 작품은, 그렇게 필름(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로 귀결된다.



글로리아는 리버풀을 떠난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리버풀을 떠나는 택시 안에서 그녀의 뒷 배경을 필름으로 치환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혹은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는 영화의 원제처럼, 영원 혹은 필름으로 상징되는 리버풀에서 글로리아는 죽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피터의 기억 속 과거는 항상 필름의 질감으로 환기되었고, 이를 통해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그들의 사랑 그리고 필름이라는 흔적을 기억 속에 남겨두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리버풀을 떠나는 글로리아를 프레임으로부터 떼어낸 채 프레임의 뒷 배경을 필름으로 영사하는 순간, 리버풀에서 그와 함께 했던 그녀 삶의 마지막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려는 피터의 마음 그리고 영화의 의도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구조에 그대로 투영되어 영원히 박제된다.


남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작품. 인물에 대한 존중을 표하려는 영화. 황혼기를 직시하며 그 순간을 오롯이 맞이할 줄 아는 작품. 필름(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로 켜켜이 쌓아낸 영화. 그러니까 필름으로 박제되어 영사되는 순간, 기억 속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 모름 리버풀 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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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스타 인 리버풀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2017)

dir. 폴 맥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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