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Dec 31. 2018

그렇게 모두 영화가 되었다, '로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R]omano.


한 명의 예술가가 자신의 고유한 세계와 경험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여낸 결과물을 모두가 공유하게 될 때, 그 정서는 자연스레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 된다. 알폰소 쿠아론이 각본, 연출, 촬영, 편집 그리고 제작까지 모두 맡은 ‘로마’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자신의 오롯한 개인적 기억을 영화예술이라는 형식을 빌어 풀어내는 순간, 이를 관람하는 이들은 모두 이 특정한 기억을 개개인의 경험으로 치환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라는 예술의 존재 의의 역시 깊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왜 영화를 만드는가, 혹은 영화는 왜 영화여야 하는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담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로마’만큼이나 간명하고 훌륭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작품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인간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에 대한 감정적인 울림과 영화가 영화여야 하는 이유에 대한 기술적인 화두가 이 영화에는 모두 담겨있다. ‘로마’를 보는 모두가 향유하게 되는 내밀하고도 강렬한 이 영화적 경험은,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 속 훌륭한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이 작품을 그의 최고작으로 꼽기에 일말의 고민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이 투 마마’ 이후 17년 만에 멕시코로 돌아와 만든 ‘로마’는, 그가 직접 밝혔듯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게 바치는 자전적인 영화다. 대부분 알폰소 쿠아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멕시코시티의 로마 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1970년에서 1971년으로 이어지는 1년 동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멕시코시티의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본인의 과거를 회상하듯 만들었다는 점에서 ‘로마’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이 이야기가 소수인종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담아내고 있는 사회적인 담론의 깊이를 생각해볼 때 ‘로마’는 어쩔 수 없이 공적이다. 개인의 기억 속에 실존하는 인물을 바탕으로 한 주인공의 1년 동안을 지긋이 따라간다는 점에서 ‘로마’는 지극히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일반적인 정서의 감정적 진폭을 생각해보면 ‘로마’는 더할 나위 없이 보편적인 모두의 이야기이다.


사적이지만 공적이라는 것, 혹은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이야기한다는 것. 플롯 상으로는 다양한 인물군상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결국 이 영화는 관객들이 주인공 클레오가 되어 그녀가 경험하는 1년 간의 이야기를 좇아갈 것을 바라고 있다. (이 영화는 클레오가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스페인어와 미스텍어에만 자막을 삽입할 뿐 영어 등의 언어에도 자막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로마’의 자막이야말로 관객들이 클레오의 입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을 관객 자신으로 치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제 3자로서 존재한다. 로마 지역의 1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의 흔적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 뒤에 선 이야기의 서술자이자 관찰자.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 속의 모든 이야기와 장면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토대로 쌓아올려진 것이라 말했다. (영화가 끝나자, 그의 실제 기억 속 인물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자 ‘리보에게(para Libo)’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이를 보여주듯 이 영화의 각본은 그 구체적 설정에 있어 매우 상세하게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개인에게 바치는 헌사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런 각자의 기억들을 갖고 있는 세상의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개체로 기능하게 된다.



[O]rigen.


알폰소 쿠아론의 SF 근작들(‘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과는 장르적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작품이 모두 그랬듯 ‘로마’ 역시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허나 그의 이전 두 편과 달리 이 영화에서 탄생이라는 동적 메타포는 다소 다르게 발현되는데(‘칠드런 오브 맨’과 ‘로마’의 후반부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각각 생명의 태동이 불가능한 디스토피아(‘칠드런 오브 맨’) 그리고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그래비티’)을 배경으로 한 이전 작품에서 생명의 탄생이 경건할 정도로 신화적인 지위로 다루어졌다면, ‘로마’에서 생명의 탄생은 오히려 소멸과 끊임없이 대치되거나 비교된다는 점에서 다소 염세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영화 초반, 건물 옥상에서 방금까지 활발하게 움직이던 아이와 나란히 누워 눈을 감은 클레오는 죽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장난스레 말한다. 영화 중반, 임신한 클레오가 병원을 방문해 신생아실을 구경할 때 갑작스레 지진이 발생한다. 아기에게 건물의 잔해가 쏟아지지만, 인큐베이터라는 보호막에 의해 간신히 보호받은 그 아기는 살아남아 새근새근 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 직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거대한 십자가가 꽂힌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일정한 크기의 직방체라는 틀 안에서 지진의 잔해로 덮여있는 아기의 모습은 마치 흙으로 덮인 무덤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영화 후반, 클레오가 진통을 시작하던 당시 시내는 시위대로 가득 들어찬 상황이었다.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 시점은, 총에 맞은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서 죽은 순간이었다. 하나의 생명이 소멸하자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려 한다는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잔인한 역설. 심지어, 총을 쏜 일행 중 그녀 아이의 아빠가 있었다는 지독한 딜레마까지.) 클레오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직전, 누군가는 총에 맞거나 피를 흘리며 건물에서, 도로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숱하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클레오가 낳은 아기마저 죽은 채로 태어난다. 그 압도적인 죽음(들)의 무게 속에서 사산된 아이를 품에 안고 클레오는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기와 거대한 십자가가 꽂힌 무덤을 연속된 쇼트로 이어붙여 소멸을 전제한 탄생을 암시하던 ‘로마’의 서늘한 화법은, 죽은 채로 태어난 클레오의 아기를 통해 소멸을 함의한 탄생을 암시하는 데까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로마’에서 생명 혹은 탄생은 언제나 죽음 혹은 소멸과 맞닿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이들은 살아가야만 한다. (1970년을 마무리하는 연말 파티 자리에서 산불로 모든 것들이 타버린 이후에도 1971년은 찾아왔다.) 그렇다면 이건 (알폰소 쿠아론의 이전 두 작품이 담아내고자 했던 것처럼) 생명에 대한 예찬이라기보다는 인생에 대한 의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의지는 (알폰소 쿠아론의 이전 두 작품이 그랬듯) 물이라는 근원적 상징을 통해 역설된다. 폐차 직전의 갤럭시를 마지막으로 타고 떠난 여행에서, 수영을 하지 못하는 클레오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두 아이를 가까스로 구해낸다. 아이들을 구해낸 뒤 해변가에 주저앉은 클레오는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불쌍한 아이, 나는 그 아이가 태어나길 원치 않았다고. 바닷물 속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두 아이의 생명과 달리, 양수 속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채 태어난 불쌍한 아기는 클레오가 구해내지 못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숱한 소멸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의지는 해가 바뀐 뒤에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다. 책임감 없이 떠나버린 안토니오(페르난도 그레디아가)의 자동차를 멀찍이 바라보는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도,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라)의 흔적을 마음에서 지워내야 하는 클레오도 그랬다. (무책임한 남성들이 떠나가거나 도망친 뒤, 남겨진 여성들을 담아낼 때 이 영화는 어김없이 군악대를 등장시킨다.) 사실 그녀들은 (소피아가 술에 취해 쏘아붙였던 것처럼 혼자(solas)였지만) 계속 나아갈 힘을 갖고 있었다. 소피아는 차고에 들어가기조차 벅찬 낡은 갤럭시를 팔아버리고 새로운 작은 차를 장만한다. 클레오가 페르민의 소재를 찾아나섰을 때, 무술 단련장에 나타난 차력사가 뛰어난 정신력 없이는 하기 어렵다고 했던 동작을 수많은 군중들 중에서 유일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클레오 뿐이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떠올려보면 영화의 마지막 여행에서 소피아가 안토니오와 이혼하게 될 것임을 밝힌 직후, 그들 옆에는 막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떠들썩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족(혹은 가족이 될 뻔 했던 이들)이 붕괴하는 과정과 또 다른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담아내고 있는 이 장면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탄생과 소멸을 연결짓는 이 영화의 염세적인 화법과 기묘하게 닮아있다.


살아서 누워있지만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인물들.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아기와 이미 흙 속으로 돌아간 이들의 무덤. 혹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시위 현장의 생명들과 새롭게 탄생하기 직전의 (그러나 죽어서 태어난) 생명. 그리고 물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두 생명과 구해낼 수 없었던 한 생명.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어김없이 대비시키는 이 네 가지 시퀀스는 모두 감정의 가장 깊은 골을 뭉클하게 건드린다. 그래서,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슬픈 영화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클레오와 소피아를 통해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에 대해서도 힘주어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동시에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강한 영화이기도 하다.



[M]etacinema.


알폰소 쿠아론이 촬영과 편집을 직접 담당한 ‘로마’는 물론 기술적으로도 훌륭한데, 특히나 영화 외적인 기술적 측면이 영화 내적인 정서적 측면을 완전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시네마스코프 비율 속 철저하게 짜여진 모든 프레임의 안과 밖은 서로 시청각적으로 조응하고, 마치 서로 공명하는 듯한 쇼트와 쇼트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는 러닝타임 내내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무엇보다도,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환기가 간접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지극히 메타시네마적인 영화다. 극중 클레오는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세 차례 방문하는데, 이 동일한 장소를 ‘로마’가 점진적으로 묘사하는 양상을 보면 ‘로마’가 영화예술에 대해서 의도하는 바가 드러난다. 극중에서 클레오는 페르민과의 데이트를 위해 영화관을 처음으로 방문하지만, '날씨가 워낙 좋잖아’라는 페르민의 말에 영화관에 들어가지 않는다. 즉, 이때 영화관 안의 스크린은 화면에 담기지 못했다. 클레오가 두 번째로 영화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페르민과 함께 좌석 맨 뒷 자리에서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영화관 안의 상영관 전체를 프레임 속에 담으며 스크린이 화면 속에 안기는 순간, 앞선 첫 번째 방문에서 등장하지 못했던 프레임 속의 프레임('로마'의 주인공들이 관람하는 제라르 우리의 1966년작 ‘파리 대탈출La Grande Vadrouille’)이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극장에서 ‘로마’를 관람하는 실제 관객들의 시점에서 이 장면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게도 영화 밖의 관객들이 스크린('로마')을 바라보는 광경은 영화 속의 클레오가 스크린(‘파리 대탈출’)을 바라보는 광경으로 정확히 한 겹 안기게 된다. 영화의 구조 속에 현실이 적확히 투영되는 순간. 첫 번째 방문에서 스크린을 볼 수 없었던 클레오는 두 번째 방문에서 스크린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그건 관객들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신묘한 기법은 클레오가 마지막으로 영화관을 찾았을 때 더욱 의도적으로 묘사된다. 이때 영화를 보는 클레오의 모습은 전혀 묘사되지 않고, 대신 프레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프레임(존 스터지스의 1969년작 ‘마루니드Marooned’) 그 자체이다. (우주에 고립된 우주비행사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알폰소 쿠아론의 전작 ‘그래비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 역시 재미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 프레임 속에 담기는 양상이다. 앞에서 화면 밖 관객들-스크린의 관계가 화면 속 클레오-스크린의 관계를 한 겹 안은 채 묘사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어지는 마지막 영화관 장면에서 프레임 속의 프레임을 화면 가득 메워버림으로써, ‘로마’는 클레오-스크린의 관계를 관객-스크린의 관계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말인즉슨, 클레오가 세 번째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순간, 클레오가 스크린(‘마루니드’)을 관람하는 시점은 정확히 ‘로마’를 관람하는 관객들의 시점과 동일하다. (영화 밖이든 영화 안이든, 이 순간 클레오 혹은 관객들이 보게 되는 것은 오로지 ‘마루니드’의 프레임 뿐이다.) 이 장면에 이르러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 밖의 관객들 역시 영화 속의 클레오가 된다.



영화관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첫 번째 방문, 그리고 영화관 안을 전체적으로 담아낸 두 번째 방문, 그리고 영화관 안 스크린에 영사된 프레임만을 비추는 세 번째 방문. 스크린에 점점 가깝게 다가가도록 점진적으로 묘사된 이 세 가지 장면을 순서대로 이어붙여 볼 때 이는 결국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리고 이때 영화 속으로 밀어넣어진 관객들은 정확히 클레오의 시점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로마’에 자막으로 삽입된 두 언어가 클레오가 소통할 수 있는 스페인어와 미스텍어 뿐이라는 점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클레오가 세 번째로 영화관을 방문하는 시점에 이르러, 관객들의 삶 역시 클레오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이 이야기는 사실 클레오의 이야기인 동시에 모두의 이야기라고,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의 구조를 빌어 모든 관객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클레오가 마지막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순간, 관객인 우리 모두는 이미 영화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영화 안팎이 하나로 공명하는 이 황홀한 순간, 나는 이 순간을 알폰소 쿠아론이 건 영화적 주술이라고밖에는 부를 방법이 없다.


결국 ‘로마’는 클레오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처럼 관객들 모두의 삶 역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메타시네마적 포부를 가진 영화다. 프레임 속 프레임이라는 안긴 형태의 예술이 실제 객석과 조응하는 순간의 시너지, 혹은 그러한 영화적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감흥. 그리고 그건 결국 인생과 영화를 떼어놓고 싶지 않은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고 믿는) 알폰소 쿠아론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A]ventura.


‘로마’가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언급했었다. 극의 후반부에서 소피아는 아이들과 클레오를 모아놓고 우리는 모험을 떠날 것이라고 되뇌인다. 그리고 소피아와 클레오는 각각 안토니오와 페르민의 흔적을 딛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허나 ‘새로운 모험’이라는 거창한 어구를 반복적으로 내뱉은 뒤에도, 혹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그들의 일상이 극적으로 변화할 것 같지는 않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장면이 아니라 기존의 장소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말하는 모험이란 떠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클레오는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해 줄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다’고 말한다. 모험의 진가는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 발휘된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의 항상성을 아름답게 설파한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신비롭게 맞물리는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동일하게 클레오가 일하는 가정집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 양상은 정반대에 가깝다. 클레오가 물청소를 하고 있는 바닥을 향하도록 프레임을 구성한 영화의 첫 쇼트와, 동일한 장소에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를 비추며 하늘을 향하도록 프레임을 구성한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그 자체로 거울의 상처럼 느껴진다. 카메라의 지향점을 반대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 아스라한 희망을 읊조리고 있는 ‘로마’의 오프닝과 엔딩은 클레오의 삶에 방향성에 대한 뛰어난 은유다. 집안을 분주하게 오가며 일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줄곧 담아내면서도 클레오가 어딘가로 내려가는 모습만을 주로 묘사할 뿐 올라가는 모습을 거의 묘사하지 않았던 이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클레오가 새로운 장소로 올라가는 모습을 완전하게 담아내며 새롭게 펼쳐질 클레오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던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물이 흥건해진 바닥에 비치던 하늘은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바로 그 하늘이기도 했다. 구름을 가르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이 물 속에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하향하는) 카메라 그리고 클레오의 시선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하늘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상향하는) 카메라 그리고 클레오의 시선과 정확히 대치된다. 그러니 ‘로마’는 숱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상승하려는 영화다. 에둘러 말하자면, ‘로마’는 클레오의 성장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클레오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하늘을 향해 고정된 카메라의 프레임 속 엔딩 크레딧이 모두 지나간 후, 혹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가 세 차례 지나가고 산스크리트어로 내면의 평화를 의미하는 ‘Shanti’가 세 번 반복되어 마치 주문처럼 새겨진 뒤에야 ‘로마’의 이야기는 비로소 끝이 난다.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에게 바치는 헌사는 영화 말미의 자막처럼 리보에게 바치는 헌사가 되고, 결국 이 영화와 함께한 관객 모두에게 바치는 헌사가 된다. ‘로마’ 속 서술자이자 관찰자인 알폰소 쿠아론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서 이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라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이쯤 되면 ‘로마’에는 알폰소 쿠아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자신의 특정한 기억 속에 각인된 덩어리를 영화예술이라는 도구로 조각한 뒤, 누구나 감응할 수 있는 뭉클한 이야기로 매끄럽게 다듬어 세상에 내놓았다. 소원하게만 보였던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가장 밀접하게 연결지어 삶을 어느 때보다도 절망에 가까운 어조로 담아내고 있지만, 제한된 영역(물이 흥건한 바닥)만을 담을 수 있었던 카메라가 방향을 뒤집자 모든 공간(비행기가 지나가는 하늘)을 품게 되는 오프닝과 엔딩의 대조를 통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언제나 거기 있었던 희망을 내비친다. 물론 이때 희망은 모두의 것이다. 영화 속 클레오가 영화 밖 내가 되는 순간의 기적, 그렇게 ‘로마’ 속 타인의 이야기가 이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나 자신들에게 개인의 이야기로 순환하는 순간의 기적. ‘로마’라는 걸작은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예술가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자, 알폰소 쿠아론이 만들어낸 작품이 영화여만 했었던 이유에 대한 조심스럽지만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다. 곱씹어도 곱씹어도 ‘로마’는 영화 그 자체다. ‘로마’를 통해 그렇게 우리 모두 역시 영화가 되었다.


-

로마 (Roma, 2018)

dir. 알폰소 쿠아론

★★★★★

매거진의 이전글 필름 시대의 사랑에 대한 헌사, '필름스타 인 리버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