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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13. 2019

시대의 심장박동을 닮은 영화, '레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Лето, 2018)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레토’는 마치 심장박동을 닮았다. 내내 펄떡이고 있지만 자세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기에 그렇다. 큰 틀에서 음악영화로 정의될 ‘레토’는, 실존했던 뮤지션 빅토르(유태오)와 마이크(로마 즈베르)의 삶 중에서 일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인물에 대한 전기영화라기보다는 시대에 대한 르포영화처럼 보인다. 애초에 ‘레토’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과 지향하고 있는 이상 간의 간극이야말로 영화 속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기에 그렇다.


구소련 붕괴 이전 1980년대 초의 레닌그라드라는 시공간적 배경은, 결국 ‘레토’가 2018년 제작 당시의 시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듦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었는지를 에둘러 보여준다. 억압적인 당시의 시대에서 방종으로 치부되기까지 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영화 내내 정형화되지 않은 특유의 리듬으로 두근거리고 있는데, ‘레토’는 이를 무척이나 감각적인 방식으로 담아낸다. (어쩌면 이 영화가 실제 뮤지션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음악영화처럼 만들어진 것은, 특정한 시대의 감각을 제일 극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에는 불러서는 안 되는 가사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다. 그러니까 ‘레토’가 철저한 감시와 검열 하에 진행되는 마이크의 콘서트 장면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단순한 음악영화가 아니라 시대의 금기에 대한 영화임을 말해준다.



물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극의 구조적 구성에 있어 탁월하다. 마치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듯 일종의 뮤직비디오처럼 촬영된 극중 뮤지컬 시퀀스야말로, 이 영화가 특정한 인물들의 인생이 아닌 특정한 시대의 공기에 대한 영화임을 증명한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인물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뮤지컬 시퀀스에서 빅토르와 마이크는 단 한 차례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주변인물들이거나, 그 순간에만 출연하는 엑스트라들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가수를 주인공으로 삼고도 영화에서 가장 음악적인 순간들을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에게 헌사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레토'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들이 겪어내야만 했던 시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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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토킹 헤즈의 ’Psycho Killer’로 시작되어 데이빗 보위의 ‘All the Young Dudes’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뮤지컬 시퀀스에는 두 가지 특징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는 뮤지컬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스켑틱(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이라는 캐릭터의 존재이다. 그는 영화의 등장인물이면서도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대사를 내뱉을 뿐더러, 앞서 벌어진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음(этого не было)'을 재차 강조한다. (스켑틱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하는 말은 관객들에게 뇌까리는 ‘어설퍼 보이는데’라는 대사였다.)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그래서 영화 밖에 존재하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처럼 보이는 스켑틱은 말하자면 영화와 관객 사이에 놓인 중간자이다. 스켑틱은 노래가 끝나면 기차를 멈춰세우거나('Psycho Killer') 자전거를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Passenger’), 혹은 어느 좋은 날의 아련한 향수에 대해 읊조리기도 한다('Perfect Day'). 억압된 자유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강렬한 관념이 뮤지컬의 형태를 빌어 노래로 표출되는 영화 속 유일한 순간들마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시퀀스의 전제 그리고 스켑틱의 존재는 슬프도록 무력하다.



두 번째는 흑백의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된 영화에서, 극적인 순간마다 프레임이 위아래로 확장되거나 컬러로 촬영된 영상이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인 2.35:1보다 상하로 좁은 화면비를 채택하고 있다. 뮤지컬 시퀀스마다, 이 비율은 위아래로 프레임-브레이크되어 2.35:1의 화면비로 확장된다.) 영화예술의 시각적인 특장점을 적극적으로 극에 끌어들여 활용하는 이러한 작법이야말로 이 영화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좁은 비율의 흑백 영상으로 묘사되는 실제의 삶이 아니라 (극중 카메라맨의 카메라 속에 담긴) 컬러 영상 혹은 (뮤지컬 시퀀스에서만 존재하는) 확장된 프레임. 내내 흑백의 단조로운 톤으로 전개되는 ‘레토'의 영상에서 색채의 전환, 비율의 확장 그리고 스크래치 난 필름이 가져다주는 비현실적인 이질감은,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흑백의 특정 비율로 상징되는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려는 영화의 목표에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컬러 영상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생각해보면, 경직된 분위기로 진행되던 마이크의 콘서트에 스켑틱이 난입하는 장면, 그리고 ‘All the Young Dudes’가 흐르며 극중 등장인물들이 팝 뮤지션들의 앨범커버를 따라하는 장면이었다. 전자는 현실이 아닌 거짓이고 후자는 흉내를 통한 모방이다. 비록 진짜가 될 수 없지만 진짜를 꿈꾸는 이 영화는 필사적이다.


이 영화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적 기법을 활용하는 장면들은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같이 기벽적이다. 이때 말하는 기벽은 ‘레토’에서는 긍정에 가깝다. 인물들이 돌파할 수 없는 시대의 벽을 영화가 돌파해주려 애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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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가 이처럼 영상을 다루고 있는 양상과 빅토르가 결성한 그룹명 ‘키노’를 떠올리면 이 영화의 지향점은 보다 더 분명해진다. (‘키노кино’는 러시아어로 영화를 의미한다.) 빅토르의 앨범 발매 기념 파티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펑크(알렉산드르 고르칠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스크린에 영사되고 있는 영상 속으로 곧장 뛰어들어간다. 이때, 어김없이 화면 비율은 확장되고 흑백 스크린은 컬러 영상으로 전환된다. 흑백의 현실에서 컬러의 영상 속으로 들어간 펑크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는 듯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레토’가 묘사하고 있는 암울한 흑백의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영역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는 곧 ‘레토’라는 영화와는 다른 층위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와 관객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스켑틱이 영화보다 더 바깥에 존재한다면,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영상 속으로 사라진 펑크는 영화보다 더 안쪽에 존재한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면서도 ‘레토’라는 층위와는 다른 단계에 존재하는 스켑틱과 펑크야말로, 창작자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상징적인 분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켑틱 혹은 펑크와 다르게) 실존했던 인물이자, 이 지난한 시대가 저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빅토르와 마이크는 흑백의 현실을 탈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빅토르가 결성한 그룹 ‘키노’의 무대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레토’에서 전기영화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엔딩에 이르러 두 인물의 생몰년도를 자막으로 띄우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를 살다간 인물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영화여야만 하는 ‘레토’에서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대한 헌사를 바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가 빅토르와 마이크 모두와 누구보다도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를 비추며 끝난다는 점이야말로 그 헌사와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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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원제 ‘Лето’는 러시아어로 여름을 의미한다. 극중 후반부 파티가 끝나고, 방을 정리하려던 누군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고 말했다. 그러니 ‘레토’의 시점에서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이 오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나고 만다. (극중 흘러나오는 노래 ‘На Кухне' 속, 영화는 이미 끝났다는 가사는 이를 기묘하게 환기하는 것만 같다.) 한편 ‘레토’는 극 초반부 인물들이 해변가에 다같이 모여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기도 했다. 그 순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레토’에서 여름은 곧 자유다.



아직 맞이하지 못한 자유는 (결국 다가올 여름처럼) 영화가 끝나면 찾아올 수 있을까. ‘레토’의 마지막 장면에서 빅토르가 부르는 노래 ‘Дерево'에는 나의 나무가 채 일주일도 가지 못할 것이라는 가사가 있었다. 이미 정해진 끝을 노래하는 것만 같은 이 가사는 단명한 빅토르와 마이크, 나아가 찾아오지 못한 이 영화 속 자유의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는 키노의 동명곡 ‘Лето’를 엔딩 크레딧에서 들려주며 그 아스라한 여운을 환기한다.) 그러나 ‘레토’ 속에서도 시대의 자유에 대한 갈망만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레토’ 이후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러 과거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만들어져야 했다. 이렇게나 감각적인 화술을 통해서 이렇게나 시대적인 화두를 노래하고자 하는 모든 의도야말로, ‘레토’의 심장박동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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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 / Leto (Лето, 2018)

dir.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러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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