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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14. 2018

오즈 야스지로 아카이브 특별전

2018.01.11 - 2018.01.28, 서울아트시네마.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이름인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 중 6편을 관람했다. ‘피안화’가 좀 아쉬웠다곤 하지만 여섯 작품 모두 좋았는데, 그 중에서도 ‘만춘’, ‘동경 이야기’, ‘꽁치의 맛’은 정말이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필모그래피만큼 ‘반복’과 ‘변주’라는 테마가 어울리는 영화세계가 있을까.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6편만을 보고 그의 작품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사실 거만한 일이겠지만) 항상 비슷한 틀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마다 각기 다른 태도로 변화하는 감정을 담아내는 그의 영화들을 보며 추운 1월, 정말 행복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가족, 그리고 그들의 삶은 언제나 가장 중요하지만, 정작 가족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결혼, 탄생, 죽음은 그의 영화 속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대신에, 이러한 사건들의 앞뒤 이야기만이 제시된다. 그러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전조와 여파의 영화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전조’에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남겨질 이의 모습이고, ‘여파’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남겨진 이의 모습이다. 한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방점이 놓여있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해체이다. (‘만춘’ 이후 후기작들을 중심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곧 딸의 결혼이다. 결혼은 또 다른 가족을 탄생시키지만, 오즈 야스지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혼으로 생겨나는 가족이 아니라 결혼으로 사라지는 가족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신랑과 신부가 연을 맺는 결혼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결혼으로 흩어지게 되는 부모와 자식의 모습을 결혼식 전과 후에 걸쳐서 담담하게 담아낼 뿐이다.



1949년작 ‘만춘’은 이후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 속 중요한 배우로 자리매김한 하라 세츠코가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이면서, 기존에도 오즈와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추었던 그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배우 류 치슈가 공연한 영화이다. 무엇보다도 ‘만춘’은, 전후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테마로 자리매김하는 소재인 부녀 간의 관계역학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홀로 남은 아버지와 결혼을 앞둔 딸. (이후 이 소재는 ‘가을 햇살’에서 홀로 남은 어머니와 결혼을 앞둔 딸로 변주되기도 한다.) 반 세기가 넘도록 논란이 오고간 것과 같이, 사실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딸은 상당히 교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이대로가 행복하고 아버지를 홀로 두고싶지 않아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딸과, 그런 딸이 자신의 품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 사이의 감정선은 영화 속에서 간헐적으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적 조충(潮衝)을 자아낸다.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 작품세계에서 여러모로 원형과도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교묘한 걸작.



이어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1953년작 ‘동경 이야기’. 세대 간의 간극 혹은 갈등은 그의 영화 속에서 부차적인 플롯으로 여러 차례 다루어지고 있지만(당장 ‘맥추’에서도 그렇고, ‘피안화’ 역시 그렇다), ‘동경 이야기’는 그 자체로 부모자식의 세대 간 차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조금 다른 가족영화다. 오즈 야스지로가 실제로 가족을 꾸린 적이 없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동경 이야기’가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남겨진 이의 쓸쓸함이다. 어찌 보면 정석적으로 느껴지는 이 영화의 구성 속에서, 여행에 해당하는 전반부의 이야기는 귀향 이후의 후반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주인공들의 고향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잠시 방문했을 뿐인 도쿄를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이건 타향인 ‘동경’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그 후의 삶에 어떤 여파를 미치느냐의 문제일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유작인 1962년작 ‘꽁치의 맛’. 오즈 야스지로와 수십 작품을 함께 한 각본가 노다 고고 그리고 배우 류 치슈와의 마지막 협업이기도 했던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등장하는 그 움직임과 그 뒷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꽁치의 맛’은 영화 내적으로도 완벽하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190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63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 내러티브와 맞물려서 류 치슈의 그 뒷모습이 오즈 야스지로의 삶과 겹쳐지는 순간, 오즈 야스지로라는 삶은 신화가 되고 ‘꽁치의 맛’이라는 영화는 전설이 된다. ‘꽁치의 맛’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나 각별하다. 쓸쓸함과 유쾌함을 하나로 담아낼 수 있는 연출적 노련함은 물론, 전후 ‘만춘’에서 시작되었던 부녀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천착이 만개한 동시에, 그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그가 겪은 적 없는) 가족적 정서가 농익어 있는 압도적인 걸작. 이런 영화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겨준 데에 대한 고마움과,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간 데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다. 앞으로 나는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아마 앞으로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을 접한 뒤에, 좀 더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초기작들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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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02 만춘 / Late Spring (晩春, 1949)

S003 맥추 / Early Summer (麦秋, 1951)

S004 동경 이야기 / Tokyo Story (東京物語, 1953)

S006 피안화 / Equinox Flower (彼岸花, 1958)

S007 가을 햇살 / Late Autumn (秋日和, 1960)

S008 꽁치의 맛 / An Autumn Afternoon (秋刀魚の味,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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