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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구속력
영화 '소리도 없이'의 주인공인 태인(유아인)은 말을 못 하는 인물이다. 태인은 사수 격인 창복(유재명)의 어시스턴트를 맡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조폭들이 중요한 업무(?)를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세팅하고 뒷정리하는 일이다. 작업이 차질 없이 잘 끝나면 시신을 수습해 정성스럽게 매장하고, 피범벅이 된 작업공간을 청소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혐오감과 공포감을 주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창복과 조폭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들은 지극히 보통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창복은 전문성과 철학까지 갖춘 장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리고 태인에게 꼼꼼히 주지 시키는 모습에서 '도제식' 교육의 좋은 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럽고 추잡할 뿐, 이들의 도제식 교육환경은 문제가 없어 보이며 심지어 안정감 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관계나 상황을 바라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발생한다. 문제는 창복뿐만 아니라 조폭이나 브로커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고문, 폭력, 납치 등의 범죄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처럼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이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태인이다. 하지만 태인은 불만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 반기를 들지 않으며,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태인과 함께 이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인, '무언의 구속력'이다.
평범한 일상 속 비범한 사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태인에게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부득이하게 납치된 아이를 맡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들이 납치된 아이를 인수받으러 가는 에피소드에서는, 앞서 나타난 '무언의 구속력'이 좀 더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길을 잃은 창복이 전화를 걸고, 브로커와 다방종업원은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준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만 보면 납치된 아이를 받으러 가는 상황이 아니라, 유치원에 입학상담을 받으러 가는 학부모와 원장 선생님의 대화 같다. 이렇듯 납치라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안정적인 분위기가 지속될수록 관객들은 이질감에 적응되고, 나아가 이 분위기가 '정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점점 더 관객들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에 대한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식이고 비상식인지가 혼란스러운 관객에게, 보란 듯이 본격적인 이야기는 던져진다.
현실/비현실의 판단
창복은 납치된 소녀 초희를 태인에게 떠넘기고, 태인의 삶에는 균열이 생겨난다. 태인은 극구 초희를 거부했지만, 일을 주는 조폭의 부탁이기에 거부할 수 없다는 창복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태인의 집에 잡혀간(딱히 반항도 억류도 없었지만) 초희는 쓰레기장 같은 창고 안에, 자신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가 산발을 한 거지꼴로 잡혀있는 것을 본다. 초희는 자신이 구출되면 반드시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이내 그 아이가 태인의 친동생 '문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머쓱해진다. 쓰레기장 같은 창고는 사실 태인과 문주가 사는 살림방이었고, 거지꼴을 한 문주는 방임된 아동일 뿐이었다.
이 상황을 '과한 설정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교육 수준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 벙어리 시골 청년과 어린 여동생 단 둘이 사는 집이라면, 오히려 이런 생활환경에 처한 것이 '사실적'이라고 보였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가진 '혼란'에 적응된 관객들은, 이 설정에 대한 역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보이게 되는 이 상황. 어쩌면 이 영화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토템'과 '할.많.하.않.'
어느 순간 관객들은 영화가 가진 이야기 방식에 적응해,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인다. 살인, 납치, 인신매매가 일어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편안(?)하게 이야기를 조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까지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것이 한 편의 우화인 것을 잊지 말라는 듯,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판단하게 하는 장치로서 '토템'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제공된 토템은 '태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태인은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지만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요새 말로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라는 것처럼, 태인은 영화 내내 '할.많.하.않.'의 감정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본다.
관객들이 이 우화에서 정신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태인의 표정과 몸짓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마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스릴러와 좋은 배우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초희는 태인과 문주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생활습관이나 질서를 변화시킨다. 잠깐이나마 '태인과 문주의 삶이 초희로 인해서 변화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닳고 닳은 영화 관객으로서 오랜만에, '어떻게 될까?'라는 순수한 궁금증이 들게 했다. 이런 측면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굉장히 좋은 스릴러라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영화는 크게 2가지 측면에서 재밌다.
첫째는 '혼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존의 상식과 보편성이라는 잣대는 내려놓아야 했고, 동시에 다른 의미로 그 잣대를 잘 붙들고 영화를 봐야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감과 긴장감은 가장 큰 재미였다.
둘째는 '유아인'이다. 태인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표정, 눈빛, 몸짓, 숨소리 만으로 의사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은 '완전'했다. 연기적인 평가는 의미가 없을 만큼, 그 인물로서 그 세상 속에 존재했다고 느껴졌다. 어디서도 본적 없는 그 사람을 거기서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에서의 재미는 충분했다고 느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여담이지만, 초희는 처음 등장할 때 '토끼'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땅굴로 들어간 것에 대한 오마쥬 같다. 태인은 초희를 만난 이후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꿈을 꾸었다.
초희는 다시 학교와 부모의 곁으로 돌아간 장면에서 성숙한 표정으로 90도 인사를 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성장동화 아니겠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초희의 성숙한 표정에서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고, 그 순간 현실감각을 되찾고 줄행랑을 치는 태인의 표정에서 또한 번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태인과 초희는 둘 다 '앨리스'가 아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