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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fille Dec 27. 2019

<소무>, 거장의 풋풋한 첫 영화

지아장커의 <소무> (1997)

시를 쓰는 문학청년, 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였던 지아장커는 첸 카이거의 <황토지>(1984)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 속에 자신이 알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게 그에게 하나의 충격이었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이후 1993년도부터 1997년까지 그는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다. <소무> (1997)는 지아장커의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1997년, 지아장커는 잠시 들리게 된 고향 편양이 곧 철거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시가 사라지기 전에 펀양에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원래는 수공업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재단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도둑질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바꾼다. 프랑스어 제목인 <Xiao Wu, artisan pickpoket>은 <소무, 수공업자 소매치기>로 직역되는데, 소매치기를 ‘손과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공업’인 수공업으로 취급한다는 게 유머러스하다.


지아장커 <소무>(1997)의 프랑스 포스터


영화는 펀양에서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한 청년, 소무에 대한 이야기다. 예전 소매치기 동료이자 죽마고우였던 샤오닝이 담배 밀수로 승승장구하며 결혼에 골인하는 마당에, 소무는 여전히 소매치기로 남아있다. 주변에서는 다른 일을 구해보라고 강권하지만, 자존심이 센 소무는 거리에서 남의 주머니를 탐낼 뿐이다. 샤오닝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소무는 돈을 훔쳐서라도 그에게 축의금을 전달한다. 친구에게 무시당해 의기소침해진 소무는 도시를 전전하다가 가라오케방에서 명랑한 여급 메이메이를 만나게 된다.

첫 장편 영화인 <소무>는 이후 지아장커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여러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그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중국 사회와 그 변화에 매우 민감한 서사이다. 정체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는 인물 주변의 상황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의 변화의 물결을 강조한다. 소무가 가족들과 살고 있는 시골과 소도시 펀양의 간극, 재개발로 파괴될 거라는 펀양, 주류와 담배 밀수로 돈을 벌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당시 신문물이었던 가라오케와 삐삐의 출현 등. 지아장커는 첫 영화에서부터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 사회를 그려내는 지아장커의 미장센의 중요한 요소, 배경을 채우고 있는 실제 사람들의 모습은 첫 작품인 <소무>에서도 도드라진다. 영화는 거리에서 배회하는 소매치기를 따라가며, 당시 소도시의 인간군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지아장커는 펀양 도시 곳곳에서 실제 시민들의 사실적인 모습을 배경에 담아낸다. 대화 씬 빈 공간을 채우는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 취조를 당하는 소무를 구경하러 온 소년 무리,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거리에서 수갑에 채워진 채 꼼짝 못 하는 소무를 쳐다보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지아장커 <소무>(1997)의 마지막 장면. 소무를 비추던 카메라가 그를 향한 군중의 시선을 담으며 소무의 시선을 재현한다.



마지막 장면 이후 영화는 출연진 모두가 비 연기자임을 밝힌다. 매끈한 배우의 꾸며진 얼굴이 아닌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등장인물의 연기는 영화에 사실감을 더한다. 서로서로 잘 아는 고향에서 찍는 작은 규모의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걸까? 첫 장편영화에서 비전문 배우들에게서 이 정도의 연기 실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지아장커가 감독의 가장 중요한 자질인 연기지도에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소무>가 지아장커의 다른 영화에 비해 특별한 이유는 젊은 감독의 세련된 유머 감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네모 안경을 쓴 작은 눈, 류승범 비슷하게 생긴 배우 왕홍웨이는, 자존심이 세면서도 은근히 낭만적인 날라리 캐릭터를 섬세하게 소화해낸다. 거리에서 신문물인 오디오를 팔고 있는 작은 매대에서 구경하는 사람 근처에 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도 지갑을 가져올 아슬아슬한 순간을 기다리는 그의 뒷모습은 폭소 감이다. 지방방송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홍보해놓고는, 자신을 왜 초대하지 않았냐고 묻는 소무에게 가족끼리 조촐히 하는 결혼식이라고 대답하는 샤오닝. 항상 제멋대로 지내다가, 가라오케 여급에게 사랑에 빠져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은 소매치기로 살아가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한 청년을 보여준다.


지아장커 <소무>(1997)에서 메이메이와 소무. 롱테이크에 인물에 거리를 두는 절제된 미장센 속에,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의 설레임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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