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fille May 06. 2020

위대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아쉬운 장편 데뷔작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노의 도박사 / Hard Eight> (1996)

최근작 팬텀 쓰레드 Phantom Thread (2017)를 보고 감격해서 (대사의 절제, 음악 사용, 배우 연기 등을 종합했을 때 작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매우 섬세한 감독의 감각) 그의 영화를 모조리 찾아보기로 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뉴욕대에 진학했으나, 한 선생이 ‘터미네이터 2 같은 영화를 쓰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에 이틀 만에 자퇴했다고 한다. (예술 영화를 사랑하는 만큼 상업 영화도 좋아한다는 폴 토마스 앤더슨.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상업적인 요소를 잊지 않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학교를 떠나 영화를 만들며 감독의 꿈을 키우던 그는 26살의 어린 나이에 <리노의 도박사>를 통해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물론 부기 나이츠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도 날 때부터 거장은 아니었다...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모두 엉성하다. 시드니 같은 경우에 이전에 마피아에 연관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에는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마치 그 말이 거짓말, 작위적인 설정처럼 느껴진다. 고독하게 홀로 카지노에서 시간을 때우기만 하는 그에게 카리스마는 별로 느껴지지 않으며, 외롭고 불쌍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만약에 영화가 과거까지 살짝 보여주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존의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를 보여주는 과거의 서사가 현재에 겹쳐졌다면 훨씬 인물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게다가 시드니를 제외한 영화의 다른 인물들은 전부 일차원적이다. 존과 클레멍틴 캐릭터는 멍청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들이다. 나중에 시드니를 협박하는 조니 캐릭터는 천박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빈약한 서사도 문제지만, 영화는 감정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논리에 강박적이다. 처음 시드니가 존을 데리고 카지노에 가서 vip가 되는 방법을 알려줄 때, 연출은 이 수법에 집중하는 듯하다. 관객은 매혹적인 재즈 음악에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에 매료될 뿐, 정작 제일 중요한 그들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놓게 되는 것이다. 시드니가 왜 존에게 다가가서 도움을 주려 하는가 하는 질문은 영화를 끌고 가는 핵심 키이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큰 궁금증을 불러 잃으키지도 않는다. 영화는 시드니와 존의 첫 만남 이후 2년이 흐른 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여준다. 시드니는 존이 짝사랑하는 클레멍틴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뚜렷한 목적없이 그를 계속 도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들의 진정한 우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은 없다. 존은 시드니를 존경하며 그의 삶의 방식을 어설프게 따라하지만, 둘은 여전히 어색한 관계로 남아 있는 듯하다. 마지막에 시드니가 존에게 말하는, 나는 너를 내 아들만큼이나 사랑한다, 라는 장면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존과 클레멍틴은 서로를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도 없다. 영화는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데이트를 하며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까지 가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폭력사건이 일어난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바보 같은 말만 늘어놓는 존을 통해 이 내용을 관객에 전달한다. 답답한 존의 모습에, 그들의 성급한 결혼은 진심은 찾아볼 수 없는 오류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낮에 존과 결혼을 했지만 밤에 다른 남자와 사라진 클레멍틴에게서도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영화에 등장하는 씬부터 끝까지, 아름답지만 성적인 욕망에 종속된 천박하고 불쌍한 여인이다.

음악의 세련된 사용과 함께 매혹적인 카지노를 배경으로 텐션을 지켜가던 영화는 존과 클레멍틴이 모텔에서 한 남자를 폭행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무너지는 듯했다. 영화 속 상황 자체가 매우 빈약했다. 클레멍틴은 낯선 남자와 잤고,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때렸고,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남편이 된 존을 부른다. 존은 이 남자를 폭행하고 그의 와이프에게 전화를 해 돈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시드니는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한다. 이 장면에서 클레멍틴은 남자에게 돈을 받아내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일관된 주장을 하고, 존은 클레멍틴의 편을 고수한다. 신 초반의 입장을 고수하는 인물들로 극 전개는 정체되며, 그들은 영화에 사실감을 불어넣어 줄 만한 욕설들을 나눌 뿐이다. 사실 이 사건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배경으로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평범하고 진부한 에피소드에 불과한데,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게 좀 황당하다.

어쩌면 그게 문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란스럽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지만, 감독이 보여주는 것은 그에 비해 너무 소박하고 사실적일 뿐이다. 감독은 어쩌면 마틴 스콜세지를 존경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미니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카지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이내믹한 영화 스타일을 기대하게 만들고,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액션도 없고, 스릴도 없고, 사실 드라마도 잘 살리지 못한 빈약한 이야기일 뿐이다.



PS. 주인공 시드니에게 막말을 하며 열을 돋우는 겜블러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역할이 더 컸더라면. 그가 나온 순간 영화가 이제부터 흥미진진해지겠구나 싶었지만, 그저 개성 있는 단역일 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캄보디아의 현재를 보여주는 현대적 미학의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