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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fille May 07. 2020

가장 개인적인 발견에서 매혹적인 상업 예술 영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 Phantom Thread>(2017)

영국 50년대 패션계에서 활약하는 한 드레스 디자이너 레이놀드의 이야기이다. 그는 잠시 휴식차 시골로 향하던 길에 카페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매력적인 알마를 만나게 되고,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알마는 그가 원하는 완벽한 체형을 가진 여자다. 자신이 원하던 이상형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 영화는 피그말리온 신화를 원형으로 한다.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는 어떻게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모델을 찾느냐 혹은 어떻게 그가 사랑에 빠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모델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이다.


알마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레이놀드의 사업에 합류한다.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어서 패션쇼에 서기도 하고, 화보를 찍기도 한다. 누나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레이놀드의 드레스 회사는 그의 우아한 왕국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섬세한 남자 레이놀드는 그만큼 예민한 완벽주의자며 워커홀릭이다. 드레스 장인, 아티스트인 그는 창의성과 효율을 끌어낼 수 있는 일정에 맞게 움직이며,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그의 집이자 일터에 모인 모든 사람은 그의 일을 존중하며 그의 마니악한 기질을 참아낸다.

문제는 알마는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필요성을 아직 못 느낀다는 것이다. 아침 식사 시간은 최대한 고요하게 보내길 바라는 레이놀드 앞에서, 알마는 조심성 없이 버터를 바르는 소리로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맛있는 저녁을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레이놀드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그녀의 누나에게 잠시 집을 비워줄 것을 요청하며, 그가 항상 먹던 방식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저녁을 대접한다. 그녀는 레이놀드의 카리스마에 눌려, 그가 준 것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복종하는 스타일의 여성이 절대 아니다. 그녀는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끊임없이 지켜내려 하고, 그의 인형이나 부속물로써가 아닌 개성을 지닌 한 인격으로서 사랑받고자 노력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아픈 자신을 간호하던 아내에게서 보이던 희미한 미소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커플 간에 존재하는, 다소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완벽주의적인 예민한 남자와 그와 그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 개성 강한 여자의 이야기. 남자의 자아가 너무 세지면, 여자는 그가 자신을 버릴까봐 염려한다. 레이놀드는 아플 때면 그 누구보다도 온순하고 다정한데, 알마는 이점을 악용해 그에게 해로운 버섯을 먹게 한다. 레이놀드가 약해져 알마가 필요한 순간, 둘은 잊고 있었던 사랑의 감정을 되찾는다. 결국 영화는 그 어느 인간관계에서 마찬가지로 연인 관계에서도 피할 수 없는 주도권 싸움, 알력 관계, 자아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모두가 겪고 있는 일상의 전투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이렇게 개인적이고 사소할 수도 있는 갈등을 50년대의 영국의 패션계라는 매혹적인 콘텍스트에 녹여낸다는 데에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며, 영화를 통해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많은 감독들이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매혹적인 소재, 서사를 통해 완전한 상업영화를 만들거나, 독립 영화감독의 경우 일상을 배경으로 진솔한 방식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이에 반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매력적인 상업 영화로 끌어올릴 줄 아는, 대중성과 진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거장이다.



영화사에 주인공 이름을 딴 영화가 많은 것처럼, 영화의 분위기 혹은 스타일이 주인공 성격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기 마련이다. <팬텀 스레드>는 주인공 레이놀드의 성격과 부합하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듯한 섬세하고도 유려한 미장센을 자랑한다. 알마가 레이놀드의 자연스러운 유혹에 매료되는 것처럼, 적절한 음악을 곁들인 능숙한 연출은 관객의 감각을 일깨우며 황홀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거머쥔 최고의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함께 각본을 쓴 이 영화는 어떻게든 두 아티스트의 섬세함, 직업정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는 일련의 장면을 통해 긴장이 점점 더해지고, 균열이 커져가는 방식을 침착한 흐름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도가 지나친 상황이나 과도한 연출을 멀리하며, 두 주인공이 화를 내며 싸우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서브텍스트와 인물들의 표정과 제스처를 통해 두 인물이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며, 이는 무성 영화의 표현력을 방불케 한다. <팬텀 스레드>는 교만이나 건방짐과는 거리가 먼 영화다.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복잡한 대화가 아닌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보편성, 단순성, 그리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든다.

이 영화적 표현의 정점은 영화 후반, 레이놀드가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이유를 깨닫고 그녀와 대응하는 장면일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버섯을 넣은 오믈렛과 알마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느린 제스처로 그녀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레이놀드의 표정. 그의 표정은 사실 관계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나에게 한 짓을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알마는 변명을 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사랑해서,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랬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그녀의 당돌함에 레이놀드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야말로 환상의 커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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