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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fille May 19. 2020

빛나는 감정의 순간, 그 파편의 몽타주

왕가위의 <아비정전>(1990) / <화양연화> (2000)를 다시 보고

영화를 찍다 보면 실험적인 쇼트를 하고 싶어도, 시나리오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인 친구와의 대화 씬을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찍을 수 없고, 집에 쓸쓸히 걸어가는 인물을 고속 촬영할 수도 없다. 현실을 모델로 하는 드라마 장르를 연출하는 감독들은 대부분 사실주의에 입각해 영화적인 표현을 절제하는 게 일반적이고, 관객은 평범한 장면 연출에 익숙하다. ‘영화적인 장면’의 기준은 애매할수도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기술적인 특성이 적극 활용되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해보자. “훌륭한 영화는 멋진 세 장면이 있고, 잘못된 장면이 없는 걸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던 하워드 혹스의 말처럼, 대체로 일반 장편 영화에서 ‘영화적인 장면’이 세 장면만 나와도 신선한 작품으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최근에 왕가위 영화 예술의 정점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양연화>를 다시 봤다. 좁은 복도로 배경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남녀의 설렘을 부추기는 미장센,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재구성된 홍콩의 60년대 모습, 리첸(장만옥)과 추오(양조위)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고속 촬영하고 거기에 심장 떨리는 음악을 곁들인 장면 등 <화양연화>는 어떻게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이미지, 사운드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해 뛰어난 종합 예술이 될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주는 걸작이다.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뤼미에르의 전통을 따르는 프랑스 사실주의 영화들을 많이 보다가, 왕가위의 표현주의적인 영화를 꺼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왕가위의 영화도 일상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천천히 긴장의 폭이 커지는 서사로, 겉으로 보기엔 일반 사실주의 영화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왕가위 영화는 영화적인 표현에 있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거의 모든 장면에서 비범한 연출이 가능하고, 다양한 수사적 기법을 동원해도 과도하다는 느낌은 없을까? 결과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의 영화로 하여금 설렘 및 애틋한 그리움 등 사랑에 대한 관객의 내밀한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 걸까?


<아비정전>(1990)                                                                           <화양연화> (2000)


왕가위 영화가 강렬하다면 감정이 없는 순간들을 거의 대부분 걷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영화에서 드러내지 않은 부분과 보여줄 부분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아비정전>은 수 리첸(장만옥)이 일하고 있는 매점에 매일 찾아가 콜라를 사는 아비(장국영)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비는 수 리첸에게 유혹의 멘트를 날리고, 도도한 그녀는 그를 애써 무시하지만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영화는 아비의 몇 번의 매점 방문 이후 곧바로 이미 연인이 된 리첸과 아비를 보여준다. 아비와 침대에 누워있는 리첸은 그에게 결혼 의사에 대해 묻고, 아비가 그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즉 관계의 균열을 확인한다. 이렇게 <아비정전>은 시작하는 사랑의 감정과 이별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곧바로 이어 붙인다. 둘이 만나기 시작하고, 차근차근 가까워지는 시간들을 편집으로 가뿐히 뛰어넘으며 가장 중요하고 강렬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편집으로 인한 공백은 관객 스스로가 이야기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관객들이 왕가위의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느슨한 서사를 채우고, 영화는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누구나 한 번쯤 가졌던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체로 작용한다.

 

이렇게 그의 영화 속에는 중요한 씬들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는, 서사상 필요한 장면 같은 건 없다. 그의 영화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거나, 관객에게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단순히 사건이나 인물을 묘사하기 위한 장면은 최대한 배제한다. 사랑하는 남녀의 설렘과 그리움을 다루는 장면들은 삶에서 드문, 아주 묘한 순간들이다. 그리고 이 순간들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이유가 충분하다. 달리 말하면, 그 순간들은 작은 움직임에도 표현이 들끓어 오르고 있는 특별한 순간들이고, 왕가위는 이 순간에 숨어있는 메타포를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사는 곳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리첸이 서있고 그 뒤로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경찰 (유덕화)가 지나가는 쇼트는 왕가위의 스타일리시한 장면 연출의 한 예다. 그러나 이는 그저 ‘감각적’인 쇼트는 아니다. 멈춰진 리첸의 발은 아비를 떠나지 못하는 그녀의 미련을 보여주며, 뒤로 보이는 경관의 모습은 리첸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낸다.



<화양연화>에는 리첸이 추오의 방에서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 공동 거실에서 밤새 마작을 하는 이웃사람들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추오와 함께 밤을 새우고 겨우 아침이 되어서야 방을 나서는 리첸은 밖에서 들어온 것처럼 꾸미기 위해 추오 부인의 하이힐을 빌려 신고 본인의 방으로 향한다. 이때 왕가위는 돌아가는 그녀의 발, 맞지 않은 신발로 고통스러워하는 발을 보여준다. 그녀의 아픈 발은 부도덕적인 외도의 상황의 위험함, 그리고 이를 불편하게 느끼는 리첸의 마음을 대변한다.


<화양연화>, 추오 부인의 하이힐을 신고 걷는 리첸


왕가위는 감정에 대해 매우 섬세하며 미시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은 여타 영화에서보다 훨씬 복잡하며, 이는 현실에서 관객들이 경험하는 감정의 진실을 반영한다. <아비정전>의 초반부, 아비의 유혹을 물리치려 하는 리첸의 얼굴에는 긴장이 서려있다. 사랑에 빠질까 봐 두려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사랑의 시작에 대한 설렘의 복합적 감정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리첸이 아비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동전을 받는 작은 행동은 그녀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후에 리첸은 아비에게 버림받고 그의 집 주변을 방황하며 만나게 된 경찰에게 말동무가 되어주기를 부탁한다. 그는 리첸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당신 애인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속으로는 그녀를 달래주고 싶으면서도 실연에 대한 슬픔을 받아내는 수동적인 말동무가 되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떠난 사랑에 힘겨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자의 자존심, 그 아이러니한 심연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아비정전>, 아비가 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숙이는 리첸.


왕가위는 사랑의 빠진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관심을 가지며, 대화씬에서 한 인물만을 프레임에 오랫동안 담기도 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미미를 사랑하게 된 빠진 도둑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눌 때, 카메라는 아비 대신 친구의 얼굴을 오랫동안 비춘다. 모든 것을 잊고 떠나려는 아비와 반대로 그는 혼란스럽다.그는 사랑하는 미미가 아비로 인해 겪을 상실의 아픔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정전> 후반부, 아비가 죽어가는 순간 전 경관과 아비의 대화도 같은 방식이다. 리첸을 좋아했던 경찰은 그에게 4월 16일 3시를 기억하냐고 묻고, 아비는 그녀를 기억하지만, 그녀를 만나면 그가 모든 것을 잊었다고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 드라마틱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경찰의 모습만 비추며, 담담한 아비의 말은 화면 밖에서만 들려올 뿐이다.


이렇게 영화 속 감정을 중시하는 왕가위 영화는 절제를 통해 과잉으로 치닫지 않는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것으로 전해지는 울림이 그의 영화의 매력이다. 사랑에 빠진 순간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눈빛 하나로도 명확하게 표현되며, 관객들은 그 보편성을 직감적으로 이해한다. 또한, 영화 속 스치듯 지나가는 것들은 영화 속에서 보이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아비정전>에서 리첸이 경찰과 함께 걸으면서 자신의 사촌의 얘기를 할 때, 사촌은 대학을 마치고 곧장 취직을 했으며 똑똑한 남자 친구도 있다고 할 때, 사촌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그녀의 말속에 그녀의 모든 존재적 서러움이 느껴진다. 그녀가 힘든 얼굴로 매점의 빈병을 치울 때 보였던 그 답답함, 그녀의 행동에서 느껴졌던 이유모를 슬픈 기운의 원인을 이해한 것처럼.


<아비정전>, 밤 거리를 함께 걷는 리첸과 경관


왕가위의 영화는 철학적/도덕적 메세지를 담아내기 보다, 사랑의 감정이 담긴 순간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결말을 향해 내달려 가는 게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 자체가 목적이며, 그 속에는 뜨거운 심장을 지닌 아름다운 남녀가 있다. 사랑과 이별, 희망과 좌절,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과 비참한 순간들. 그의 영화들은 감정이 빛나는 소중한 삶의 파편들의 몽타주다. 그는 시간의 마술사인 동시에, 아무래도 화가처럼 작업을 하는 시네아스트인 것 같다. 구체적인 시나리오 없이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인물을 구축해나가고, 서사의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이 장면 저 장면 찍어 나가는 그의 작업 방식은 화가의 작업 방식과 비슷하다. 왕가위의 영화는 현실을 베끼지 않는다. 다른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이 그러하듯, 그는 현실을 재료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삶과 예술을 명징하게 구분하는 것.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들은 본인이 영화임을 감추지 않는 것에서, 예술적 포부를 숨기지 않는 것에서 큰 표현적 자유를 얻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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