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도 장편도 되지 못한 이야기
불어로 쓰인 내 시나리오 최종고는 서른 두 장이었다. 한 페이지를 일 분으로 치는 관습에 따르자면, 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포함해 대략 삼십오 분에서 사십 분 정도로 예상되었다. 러닝타임 육십 분 이하의 영화는 삼십 분을 기준으로 그 이상은 중편, 그 이하는 단편이라고 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의 첫 중편 영화. 지금 생각해보면 ‘중편’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를 소개해야 하는 경우, 내 영화를 커다란 단편 영화의 카테고리에 대충 욱여넣지 않았다. 굳이 구분 지었다. 졸업 ‘중편’ 영화에 출연하실 배우들을 구합니다, ‘중편’ 영화 촬영을 위해 조명을 도와주실 분을 찾습니다, 등등. 단편 영화에서 한 단계 나아간 느낌이라서 그랬을까? 무의식적으로 다음엔 장편에 도전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는지도.
그러나 대체로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장점이 아닌 핸디캡이다. 다수의 단편영화제가 20분 혹은 30분 이내의 영화만을 수급하기 때문이다. 중편영화는 제작 초기 단계부터 목표로 할 수 있는 영화제의 수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고로 관객들에게 상영될 기회가 다른 단편보다 훨씬 드물 것임을 전제로 한다. 프랑스에는 한국 영진위와 동급인 CNC나 시, 도에서 운영하는 단편영화 지원 프로그램이 많은데, 중편 영화는 배급의 이유로 투자도 쉽지 않은 편이다.
어쩌면 중편 영화는 장편 혹은 단편이 되지 못한 이야기다. 아니면 그 모든 불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딱 그만큼의 호흡이 작품에 이상적이라고 감독이 믿은 경우다. 그것도 아니라면 완성된 작품이 관객을 만나는 것보다, 그만큼의 길이와 호흡으로 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했던 경우 아닐까.
종종 단편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해 시나리오를 20장 이내로 줄이려는 노력도 했다. 사실 내용은 못 자르고 부피를 가장 적게 차지하는 폰트를 고르고 글 간격을 조절하는 등 꼼수만 썼다. 일상적인 톤의 코미디인데, 평범해 보이는 부분도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캐릭터를 진실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디테일들도 많았다. 길어지는 촬영 준비 기간 동안 작은 아이디어들을 하나 둘 주워 붙이기도 했고, 그렇게 살이 포동포동한 시나리오가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낼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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