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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꾼 Sep 24. 2023

정착과 유랑 사이, 우리가 삶의 터전을 구축하는 방식1

<미나리>와 <노매드랜드>를 중심으로 

  주거지에 대한 이슈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시기다. 이제 거주공간은 단순히 집의 개념을 넘어서 거대한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이어져온 펜데믹은 사회적 접점을 최소화로 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몇 가지 화두를 던졌다. 그중 하나는 바로 원시시대부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요소 중 하나인 ‘주(住)’에 대한 인식 재고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삶의 지침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공간 안에서 각자의 생활양식에 따라 최적화된 보금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의식을 담은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2021년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나란히 오른 영화 <미나리>와 <노매드랜드> 역시 이와 관련한 고민을 풀어내는 데에 동참했다. 언뜻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사람들의 실패극복기를 다루면서 서부 개척 장르를 내세운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작품은 외견 상 ‘정착’과 ‘디아스포라’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닮은 구석이 많다. 1980년대 경제 부흥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해온 한인 가족의 정착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몸담고 있던 지역사회를 잃고 길로 떠밀려온 한 여성의 이야기. 두 작품은 모두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각자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형상을 비추고 있다.



동산(動産)으로서의 집  


  영화는 모두 주인공들의 이동에서부터 시작된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마을의 주수입원이었던 석고 보드를 만드는 회사(USG)의 공장 폐쇄와 함께 폐허가 되어버린 엠파이어에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녀는 떠나버린 사람들이 남긴 물건을 자신의 밴에 옮겨 담으면서 여정을 시작한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곳으로의 이동. 펀의 밴은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뻗은 서부 벌판의 길가를 달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동은 <미나리>의 오프닝에서도 나타난다. 데이빗의 가족은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떠나 농사를 짓기 위해 남부의 아칸소로 향한다. 영화는 달리는 차 안에 몸을 실은 채 이삿짐 트럭의 뒤를 좇는 차량의 씬으로 시작한다. 이동하는 내내 낯선 풍경을 훑으며 지나치는 카메라의 시각은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가족들의 시각과 겹쳐지고, 뒤이어 도착한 곳에서 아내 모니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린다. 과연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노매드랜드>의 펀과 <미나리>의 데이빗 가족이 찾은 것은 장소다. 마치 임시 거처처럼 세워진 트레일러와 잠시 머무르기 위한 용도로 지어진 캠핑장은 분명 전통적인 ‘부동산(不動産)’ 형태의 집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에게 ‘집’은 땅에 고정적으로 발붙이고 선, 물질적인 자산 또는 거취지의 개념이 아니다. <노매드랜드>에서 펀은 집이 없어 괜찮으냐는 이웃주민에게 자신은 밴이 있으니 ‘홈리스(homeless)’가 아닌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대답한다. 부동하는 건축물로서의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지 머무를 안식처가 없는 상태는 아니라는 말뜻일 것이다. 펀에게 있어서 ‘밴’은 단순히 이동형 수단의 개념을 뛰어넘는 안식처이자 주거지다. 그러기에 펀은 마치 반려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밴’을 지칭할 때에 ‘그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그녀가 선구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비슷한 모습은 <미나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뒤이어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제이콥은 트레일러하우스를 보고 ‘여기가 대체 뭐냐’고 묻는 아내 모니카에게 ‘뭐긴 뭐야, 집이지.’라고 의연하게 대꾸한다. 제이콥 또한 집의 개념을 한정적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마치 새들의 보금자리처럼 지었다가 부서지고 또 다시 옮겨질 수 있는 공간.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바라보는 ‘집’은 표면적인 형태를 놓고 보더라도 바퀴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유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인물들의 이동 과정을 비추는 것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물들의 이동이 종국에는 거주 형태 그 자체를 은유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온 곳은 남겨져있지만 도착할 곳은 정해지지 않는 여정. 이 길 위에 선 이들의 이동이 거주 행태 그 자체를 의미하는 시작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시리즈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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