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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Apr 01. 2019

3월의 무성의한 일기.

겨울과 봄의 경계.

bgm


1. the saxophones "if you're on the water"

https://www.youtube.com/watch?v=tmZTIvUmWYc


2. Nick cave & The bad seeds "red right hand"

https://www.youtube.com/watch?v=RrxePKps87k


3.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https://www.youtube.com/watch?v=XOI-rNLnmpo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일상이 간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귀찮은 일들이 더 많아진다. 그러니까 거기에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귀찮게 여겨진다는 거다. 흔들리려고 할 때 가장 작은 것에 집중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상추를 씻고, 오이 껍질을 벗기고, 콩나물을 데치고,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마늘 껍질을 깐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일주일에 4번은 긴 산책을 하고, 음주는 일주일에 하루로 줄인다.


시끄러운 3월이었다. 사건사고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올 3월엔 유난히 자극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하나의 클럽 폭행사건은 여러 다른 사건들로 이어졌고, 덮어졌던 지난 사건들의 재수사가 진행되었다. 어느 사기꾼의 부모가 살해되는 섬뜩한 사건도 있었고, 치매라더니 너무도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 당당한 모습이 한 편으로는 존경스럽기까지 한- 전두환의 재판도 있었다. 엠비는 자택 구금이건 뭣이건 간에 어쨌든 보석으로 석방이 되었고, 어느 대학의 교수는 대학원생들을 이용해 자기 자식의 미래를 거짓으로 설계하고도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을 대체하고, 충격과 혐오는 냉소와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도 15세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같은 소녀를 보면서 이 세상의 묘한 밸런스를 생각하며 긍정의 에너지를 느낀다.


R.I.P 아녜스 바르다. Agnes Varda 1928-2019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몇 달째 미드 폭식 중이다. 많이 보다 보니 건너뛰기가 습관이 돼서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굿 와이프>

에피소드가 그리 길지 않아 좋았고(45분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르게 등장하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드라마가 적절하게 밸런스를 이루고 있어 좋았다.

초반에는 여러 판사들 캐릭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법의 양면성, 허점들을 보는 게 재밌었다.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윌과 다이앤의 파트너 쉽, 윌과 알리샤의 로맨스에 완전히 빠져버렸고, 윌이 죽고 나서는 괜히 허탈해서(게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갈등을 위한 갈등을 만드는 것 같아 몰아서 보던 내게는 조금 스트레스였다.)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비밀의 숲>

재밌게 봤다. 한국 드라마를 잘 안 보는 이유 중 하나는 한 회 분량이 너무 길어서 이기도 한데, 이 드라마는 70분이 언제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첫 회부터 완전히 몰입해서 봤다. 개연성 있는 캐릭터와 이야기가 16회까지 극의 긴장감을 잘 끌고 가는, 말 그대로 웰메이드 드라마였다. 제일 좋았던 캐릭터는 배두나가 연기한 한여진 경위. 진지해야 할 땐 진지하고 가벼워야 할 땐 가벼울 줄 아는, 닮고 싶은 인물. 거기다 옷도 잘 입고. ㅎㅎ


<러브 데쓰 + 로봇>

단편 옴니버스. 이런 콘텐츠가 넷플릭스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꽤 자극적이고 참신하다. 짧아서 더 강렬한 윤리적, 철학적 고민들.





<서치>

시작은 하나의 아이디어였겠지. 집요한 고민과 실험 뒤에 하나의 아이디어는 영화가 되었다.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헌터 s.톰슨의 소설을 먼저 읽었다. 읽으면서 (도대체) 이해 불가한 묘사들 때문에 쉽게 산만해졌는데 테리 길리엄의 절묘한 시각화 덕분에 이 소설을 다시 훑어보며 새삼 대단한 작품임을 실감했다. 아마도 마약으로 시대를 통찰하고 그걸 작품으로 옮기는 건 톰슨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

이수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5년. 감독이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너무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니 산만하고, 러닝타임은 길어지고. 30분 잘라내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디테일한 묘사, 그리고 천우희의 연기는 참 좋았다.


<바이스>

전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마음을 비우고 들어갔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 장치들은 조금 유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리듬을 가볍게 해 주어 나쁘지 않았다. 권력이 언론과 법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딕 체니의 정치 인생을 통해 다시 한번 공부했다. 나쁜 노무 시키! 어디 딕 체니 뿐이겠냐 만은...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

유튜브로 구매해서 봤다. 로베르 드와노의 미소와 태도가 참 인상적이었다. 삶은 여유롭게 일은 집요하게. 닮고 싶은 태도다. 종일 걸어 다니면서 하루에 한두 장의 사진을 찍었던 드와노. 그는 호기심, 반항심, 인내심을 강조했다.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모든 정성을 다하는 집요함. 명심할 것!




<상실> 조앤 디디온

조앤 디디온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레타 거윅이 <레이디버드>에서 인용한 글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중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사람은 없다.’ 특별할 것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문장과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조앤 디디온. 그녀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였다.


<상실>은 작가가 남편을 잃고 비통한 심정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비통한 심정. 나는 아직 비통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울분 비슷한 감정, 혹은 무기력한 슬픔을 느낀 적은 있지만 비통함은 모른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뿌옇게 흐려진 흙탕물의 모래가 가라앉는 시간동안, 가라앉는 모래 한 알 한 알을 세는 것과도 같은 감정의 추스름을 기록한 글에서 남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대화라는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말 한마디로 그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어떤 말 한마디가 그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 생각난다. 내 생일인 2003년 12월 5일에 받은 선물. 그날 아침에는 10시경부터 뉴욕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저녁까지 7인치가 쌓인 것으로 모자라 앞으로 6인치가 더 내린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략- 존은 저녁을 먹기 전에 거실의 벽 난롯가에 앉아 나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그가 읽어준 책은 내 작품으로, 기교적인 측면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읽느라 거실에 놓아두었던 <공도문>이었다. -중략- “젠장!” 그는 책장을 덮으며 내게 말했다. “다시는 글 솜씨가 없네 어쩌네 그런 말 하지 마. 이게 당신한테 주는 생일 선물이야.” 두 눈에 고이던 눈물이 생각난다. 지금도 눈물이 느껴진다.


몹시 부러운 부부다.


<식물원> 유진목

책을 늘 곁에 두기는 하지만 다독을 하지는 않는다. 내게 시 읽기는 특히 어렵다. 부끄럽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외는 시가 없다. 그런데 유진목의 시를 읽고 시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시가 머릿속에서 읽히는 소리가 좋고, 그려지는 그림이 좋고, 그림과 소리가 내 안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는 게 좋다. 그녀의 시 한 편을 옮긴다.


39    유목

먼 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나를 죽일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 다시 바다에 나가는 일을 망설이게 되죠.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위로가 되던가요?

여기 두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사랑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흰> 한강

흰 것들의 아름다움과 슬픔. 삶과 죽음과 그 경계.

한강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벌거벗은 채로 눈밭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예민함이 쉼표에서까지 느껴진다.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울분> 필립 로스


한국전쟁, 두려움, 유대인, 규율, 관습, 불안, 사랑, 죽음, 울분, 젊음, 부조리.

책을 읽으면서 나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위선의 말들을 진리처럼 떠들어대는 어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닥치라고! 학교에 있으면 언젠가 그런 말을 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다행히(?) 소리치기 전에 나는 학교를 떠났다. 나는 떠날 수 있었다.


마커스 메스너의 강렬하고 힘 있는 모노드라마 연극으로 각색해도 좋을 작품이다. 혹시 있는 거 아냐?


곧 나는 사업은 지저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도살장도 똑같았다. 동물을 정결하게 하려면 피를 뽑아내야 한다. 부정한 도살장에서는 동물을 총으로 쏠 수도 있고, 때려서 의식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방식으로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정결하게 죽이려면 피를 뽑아야 한다. 정육점집 어린 아들로서 도살이 뭔지 배우던 시절에 도살장에서는 동물을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았다. 우선 뒷다리를 사슬로 감는다. -중략- 그렇게 뒷다리로 매달려 있다 보면 동물의 피는 모두 머리와 상체로 몰린다. 이제 죽일 때가 된 것이다. -중략- 동물의 머리를 잡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브라차, 즉 축복이라고 부르는 아주 큰 칼을 들어 목을 긋는다. 단 한 번에 기관, 식도, 경동맥을 절단하면서도 등뼈를 건드리지 않으면 동물은 즉사하고 정결해진다. 두 번 긋거나, 동물이 병이 들었거나 불구이거나, 칼이 완벽하게 날카롭지 않거나, 등뼈를 조금만 건드려도 이 동물은 정결하지 않다. 쇼쳇은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까지 목을 벤 다음 피가 다 흐를 때까지 동물을 그대로 매달아둔다. 마치 피를 물통으로 한 통 가져다, 아니 여러 통 가져다 한꺼번에 쏟는 것 같다. 동맥에서 피가 그만큼 빨리 바닥으로, 배수구가 있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 배수구가 있음에도 피는 발목까지 차오른다. 어릴 때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여러 번 목격했다. 아버지는 내가 그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를 걱정하여,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신 자신을 걱정하여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바로 그 사람이.

위에 옮긴 글을 읽을 때 빌 비올라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쏟아지는 물, 묶인 사람의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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