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jwk May 02. 2019

4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Yves Montand "Sous le ciel de Paris"

https://www.youtube.com/watch?v=ceFxrmQhRAg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들의 잔인한 말들에 헛웃음이 나온다. 염치와 부끄러움을 상실한 자들의 저급한 코미디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된다. 4월도 그렇게 지나간다. 어떻게 벌써 4월인가...싶지만 지난 한 달을 돌이켜 보면 까마득한 4월이다. 


부산에서 엄마가 올라오셨다. 우리는 함께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보러갔고(사람이 너무 많아 한 번 더 갈 생각이다.), 종묘에도 갔다. 서울에 5년간 살면서 종묘가 처음이었다.  종묘의 신묘한 힘 덕분인지 아니면 예쁜 나무와 꽃들 덕분인지 그 날은 최근 몇 달 동안 가장 기분이 좋았다. 플레인 요거트+과일+아가베 시럽을 열심히 먹었고, 거의 매일 마시던 술을 일주일에 1-2회로 줄였으며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산책을 했다.


아침 산책은 보통 1시간 30분이 걸린다. 이 시간동안 쉬지 않고 걸으면 대략 6km, 만보를 걷게 되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몸의 부담 없이 가볍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꾸준히 하고 있다. 산책길에 핀 개나리를 보면서 벗꽃은 언제 피려나? 만개한 벗꽃을 머릿속에 그리며 걷던, 바람이 몹시 강하게 불던 날이었다. 산도 아니고, 평지를 걷고 있는데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 바람을 타고 뿌연 먼지가 모두 씻겨 나갔으면...했던 나의 바람은 다른 곳에서 재앙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강한 바람을 타고 불이 크게 번졌다. 불길은 이틀동안 산과 집을 태우고 사그라들었다. 두명이 죽고 천억원이 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전국에서 소방차들이 모여들었고, 피해복구를 위한 기부가 이어졌다. 


‘만약에...’라고  가정하는 것 만으로도 빠르게 번지는 불길의 이미지는 공포다. 이재민들의 절망 가득한 얼굴이 연민과 ‘이제 불은 끝났구나.’하는 이상한 안도감을 부른다. 


바람은 잦아 들었고, 나른한 햇살 아래로 벗꽃이 만개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꽃 앞에서 사진을 찍어댔고, 아이폰x로 핸드폰을 바꾼 나도 백만원이 훨씬 넘는 기계의 화질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은 아무런 추억도 감흥도 불러오지 못한다. 수고스럽지 않은 외로움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때로 내 삶의 방식에 의문? 혹은 의심?이 들지만 당분간은 지금처럼 소통보다 관찰에 집중할 생각이다. 


금세 잊었던 불의 공포가 악몽처럼 다시 찾아왔다. 불길에 휩싸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꿈의 한 조각처럼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불타는 성당을 바라보고 있고, 도시는 고요하다. 꿈이라면 감히 가슴저리게 아름답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은 실제로 까맣게 내려앉아 버렸다.  파리의 하늘, 세느 강, 퐁너프 그 너머로 시테 섬 위의 노트르담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퐁데자르Pont des arts 위에서는 항상 에펠탑 방향이 아닌 시테섬 방향을 보고 앉아 감상에 젖어 들곤 했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내가 올린 기도들, 뒤편 공원에서 그와 나눈 대화들, 파리에 있는 게 너무도 행복한 관광객들의 미소와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집시아이들. 기억의 편린들이 뒤죽박죽 서늘한 가슴을 찌른다.



King crimson "Moon Child"

https://www.youtube.com/watch?v=HaKjsF__lzg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이야기들을 소비하고 있는 요즘, 같은 플롯을 반복하는 드라마들에 피로함을 느낀다. 넷플릭스, 극장, 유튜브. 내가 영상 컨텐츠를 소비하는 플랫폼들이다. 하루에 최소 3시간은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를 보는데 소비하고 있다. 10초 건너뛰기가 습관이 된지 이미 오래다. 옛날 옛적, 넷플릭스는 물론이고 인터넷, 케이블채널도 없던 시절, 주말의 명화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주말의 명화에서 본 영화들은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곤 했었다. 

4월 초에 본 드라마의 주인공들 이름이 벌써 가물가물하지만 보는 동안에는 재밌게 본다. <슈츠>를 한참 재밌게 보다가 시즌3 중반부에서 멈췄고, <빌리언스>, <스페셜>, <퀵 샌드: 나의 다정한 마야>도 보는둥 마는둥 했다. 이것은 주위에 온통 미인 밖에 없는 남자의 애환이랄까? 훗...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이 시작됐다. 그걸로 충분하다.


버팔로’ 66

대학생때 본 이 영화는 우울하지만 충만한 감성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미장센, 카메라의 움직임, 음악. 그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고, 빈센트 갈로의 감성을 나는 모방하고 싶었다. 십년이 훌쩍 지나 다시 본 영화는 우울한 드라마가 아니라 코미디이고 판타지였다. 지지리 못난 남자의 애정결핍을 위로하는 판타지. ‘내가 아무리 너를 밀어내고 히스테리를 부려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너는 나를 사랑하는거야...’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나저나 빈센트 갈로는 요즘 뭐하고 있나?   


나의 작은 시인에게

자신이 아닌 무언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꾼다는 것은 ‘다름’에 감사하는 축복과 만족을 모르는 불행을 동시에 준다.


더 레슬러

보는 게 버겁다. 링 밖의 세상이 더 큰 상처라는 랜디의 말.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미성년

어디 빠지는데 없이 잘생겼지만 뒤 돌아 볼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몽상가들

2003년 가을. 부산극장. 2000석이 넘는 거대한 극장은 사람들로 가득했으나 나는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다시 본 영화는 조금 유치하고 오글거렸지만 세 배우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모두 가려졌다.    


퍼스트 리폼드

에단 호크. 에단 호크. 에단 호크.    


러브리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이토록 공허할 줄이야... 




Billie Eilish "Bad Guy"

https://www.youtube.com/watch?v=DyDfgMOUjCI


전원 교향악 앙드레 지드


제르트뤼드와 목사, 그리고 목사의 아내 아멜리와 아들 자크의 관계와 심리는 굉장히 흥미롭다. 영화로 각색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약한 존재가 나의 보살핌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는 일은 분명 엄청난 심리적 만족과 행복일 것이다. 목사의 경우엔  제르트뤼드를 향한 사랑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다른 것으로 포장함으로서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기만한다. 아내 아멜리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데...제르트뤼드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상상한 세상의 아름다움과 실제로 마주한 세상의 모습간의 간극... 아멜리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서 그때서야 실감을 하게 되는. 보지 않음으로서 가지게 되는 환상. 맹인이 글을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흥미롭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그 둘의 엄청난 차이.   



“그 애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때면 전적으로 그것을 자기의 뺨과 손등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열기와 같은 빛의 효과라 상상했으며,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물이 불 가까이에 있으면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따뜻한 공기가 노래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후에 내게 말해 주었다.”


“아아!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과 괴물처럼 흉악한 것들에 놀아나지 않고 그야말로 직접 당하는 고통에만 만족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근심 걱정은 얼마나 견딜 만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행복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을 통해 그 행복을 얻으려 애씀으로써 오히려 그 행복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사랑스러운 영혼이 자신의 자발적인 복종을 즐거워한다 해도 사랑이 없는 복종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는 것 역시 잘 안다.”


“나의 영혼은 길에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만 있었어도 우리 둘 모두 땅바닥에 나뒹굴어 넘어지고 말았을 것처럼 내 몸을 떠나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필립 로스


놀라운 책이다. 필립 로스. 대단한 작가다. 따로 정리를 해봐야겠다.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카페에 앉아 내 앞을 오고가는 사람들, 내일은 기억 못 할 사람들, 그들이 입은 옷, 표정, 행동을 보며 하는 두서없는 생각들을 줌파 라히리가 단순한 문장으로 여운이 긴 글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녀의 글을 옮겨본다.


<마음 속에서>

 "오늘 아침 집에서 나가는 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어째서 이런 것도 혼란스러워하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당장 행동하고 반응하고 움직이고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서두르지 않고 여느 때의 평범한 하루를 준비하는 동안 난 넋을 놓고 옷장 앞에서 쭈뼛거리며 뭘 입을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식사를 즐기지 못한 채 서서 아침을 먹는다. 접시에 사과 조각을 올려놓지도 않고 그냥 잘라 먹는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은지 아닌지 모르겠다. 불안하다. 어디에 있어야 할지 도무지. 십오 분이 지나고, 다시 십오 분이 흘러간다.

 막 나가려 하다가 다시 멈추고는 재킷을 벗고 옷에 어울릴 목걸이를 찾기 시작한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생각하면 어딘가에 있듯, 어딘가 보석함에 있을 거다.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면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금치산자 같다고 느낀다. 문 너무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을 하루가 앞에 있다. 수업, 동료들과의 모임, 아마 영화도 볼 거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 휴대폰이나 서류나 신분증이나 열쇠 따위를 잊어버리거나 곤경에 처할까봐 두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3월의 무성의한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