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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Feb 20. 2017

'다양성'이라는 프레임 밖의  진짜 다양성

다양성 이라는 프레임 밖의

진짜 다양성     


다양성 :(명사) 모양, 빛깔, 형태, 양식 따위가 여러 가지로 많은 특성.

출처-표준국어대사전     

다양서 영화 :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시네마워크 사업계획안'에 언급된 용어로 독립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영화 등을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상업영화와 달리 소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다. 배급이나 상영 규모에 있어서도 소규모로 진행되며, 장르에 제한이 없어 다양한 소재나 문제를 자유롭게 다루거나 실험적 시도에 의해 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수익성은 높지 않아 관객 2만 명이 들면 흥행했다고 여긴다.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 다양성 영화에는 2013년 개봉해 관객 14만 명을 돌파한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가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다양성 영화 [多樣性 映畫]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극장을 자주 찾는 관객이라면 ‘다양성영화’라는 단어가 아마도 친근할 것이다. 처음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독립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영화등을 총칭하는 말로 ‘다양성영화’를 사용했지만 오늘날 ‘다양성영화’의 범주는 굉장히 넓고 본래의 의미와 의도를 잃은 단어라고 보여 진다.     

영화라는 것은 본디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예술. 오락 매체이다. 영화인들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표현예술은 모두) 표현의 한계에 맞서 싸워왔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찍은 영상(그들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특허를 얻었고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을 빠리의 그랑카페에서 상영한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100년이 조금 넘은 영화의 역사에는 전진만이 있었다.

100년의 역사동안 영상매체는 많은 변화를 일궈 왔고 그 역사를 얘기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 앞에 ‘다양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온당한 것인가? 거대한 자본을 들인 상업영화의 힘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수단으로서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프레임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왜 하필이면 ‘다양성’이라는 단어일까? 영화란(문학, 음악, 미술, 무용, 그 무엇이든) 본디 다양성을 기본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던가? 게다가 2017년 현재 극장에 ‘다양성 영화’라는 프레임 아래 개봉되는 영화들은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진짜 자본의 힘 아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작은 영화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히려 부족한 문화적 다양성을 반증하는 용어가 아닐까?     

내가 다양성 영화라는 단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2013년 ‘비긴 어게인’이 개봉했을 때이다. (지금도 ‘다양성 영화’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영화가 바로 ‘비긴 어게인’이다.)

비긴 어게인의 제작비는 8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90억이 조금 넘는 예산이다. 헐리웃 영화에 비교하자면 초저예산이지만, 국내 영화 제작비에 비교했을 때는 90억의 예산은 대규모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스타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 마룬5의의 애덤 리바인이 출연하고 <원스>로 이미 음악 영화 감독으로 인정을 받은 존 카니 감독이 연출을 맡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적은 수의 개봉관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을 불러들이면서 더 주목을 받고 ost의 흥행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관객들은 더 늘어났다. 다양성 영화로서 이례적으로 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식의 홍보는 ‘다양성 영화’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지만, 다시 한 번 ‘비긴 어게인’이 어떻게 ‘다양성 영화’란 말인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언어도 변화를 겪는다. 많은 단어들이 새로 만들어졌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고 새로운 단어의 출현과 함께 그에 요구되는 의식과 개념이 생기기도 하고 의식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생긴 단어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될 때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이용되면서 의미의 왜곡까지 불러일으킨다.      


‘다양성 영화’라는 단어가 생기기 이 전에도 작은 영화들, 대중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영화들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있었다. ‘독립영화’, ‘인디영화’ 등. (‘예술영화’는 그 기준이 모호해서 기입하지 않겠다.) 이렇게 영화들을 나누는 기준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대중성’을 요구하고, ‘대중성’이 요구하는 것은 또한 자본이다. 자본은 영화를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이 화려함은 대중의 시선을 잡아끈다. 당연한 이치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고 한 편의 상업 영화가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배급되는 과정은 자본주의 논리에 매우 충실하다. 여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독립영화다. 독립영화인들은 적은 제작비를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예술적 감성으로 채우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상업영화가 대중에게 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힘겹게 ( 영상위원회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어도 개봉 한 번 하기 힘든 상황에 있기에 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예전에 자국 영화를 스크린 쿼터제로 지켜냈던 것처럼, 의식적으로라도 ‘다양성 영화’를 스크린에 걸자는 취지로 ‘다양성 영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알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단어가 악용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다양성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예술 영화관들.

고백컨대 나는 ‘다양성 영화’라는 단어 그 자체에서부터 거부감이 든다. 왜 ‘다양성’인가? 독립영화, 인디영화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지루할 것이다. 영상이 세련되지 못 할 것이다. 어려울 것이다. 등등등)을 의식해 이를 포괄하면서도 대중에게 거리낌이 없는 단어를 찾아가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낸 것일까?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소재의 다양성, 표현의 다양성이다.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것은 상업영화, 저예산영화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 다양성은 영화 그 자체의 정체성이다. 예산의 규모에 따른 구분은 애초에 떠오르지 않기에 대중과 만날 기회가 적은 영화들을 위한 보호막으로서 ‘다양성’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     


메가박스는 ‘필름 소사이어티’, 'g 시네마‘라는 이름을, cgv는 ’아트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다양성 영화들을 소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과연 이들이 소개하는 영화 중 진정 저예산에, 기상천외한 소재와 방식, 영화인들의 예술적 감성을 접할 수 있는 영화는 몇이나 될까? 이는 독립영화관 또한 마찬가지다. 그나마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볼 수 있지만 영화의 다양성이 매우 제한적이다.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장들의 상황을 본다면 마냥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다. 이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사업이기에 이 아쉬움은 짧게 언급만 하고자 한다.     


‘다양성’이라는 프레임 밖에 진짜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2017년, 컴퓨터만 있으면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고전영화든, 컬트 영화든 그 어떤 장르의 영화라도) 볼 수 있고, 누구라도 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온라인으로 자신의 작품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너무도 다양한 매체와 컨텐츠들이 존재하는 속에서, 선택지가 넘쳐날 때 우리는 오히려 수동적이 되고 누군가가 검증해준 컨텐츠들을 소비하게 되는데 선심 쓰듯 사용되는 ‘다양성’이란 말도 안 되는 타이틀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문화적 수양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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