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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Dec 29. 2020

[넷플릭스] 그레이스

살인사건. 우아한 각색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겨우 열여섯의 하녀가 하인과 공모해 집주인, 그리고 그의 정부이자 가정부인 여성을 살해한 것이다. 하인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하녀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모든 증거가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살인에 가담했는지 아닌지 기억하지 못한다.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와 그녀의 아름답고 순수한 얼굴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사악한 요부인 동시에 순진하고 가엾은 소녀로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녀의 사형을 외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의 사면을 요구한다. 과연 그녀는 유죄일까?


2017년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6부작 드라마 <그레이스>는 19세기 중반 캐나다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레이스>는 집주인을 살해한 하녀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갇히지 않고, 우아하고 심도 있게 관객의 관점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episode 1. 조던 박사와의 만남.

캐나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살인사건의 주인공 그레이스(사라 가돈)가 수감되고 16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의 사면을 추진 중인 단체에서 그녀의 정신감정을 위해 미국인 정신과 의사 조던(에드워드 홀크로프트)을 초청한다. 조던은 그레이스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사건 당일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매일 그녀와의 면담을 이어간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삶을 경청하고, 그레이스는 어쩌면 수천 번 반복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땀 한땀 이어간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온다. 배 안에서 그녀의 엄마는 병들어 죽고,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아버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낯선 땅에서의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부잣집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메리 휘트먼(리베카 리디아드)를 만나게 되는데 그레이스 보다 먼저 하녀로 들어온 메리는 그레이스에게 엄마이자 언니이며 친구가 되어준다. 그레이스는 메리와 함께한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고 추억한다.

episode 2. 누가 메리를 죽였는가?

잠시도 쉴 틈 없는 하녀로서의 삶은 고단하지만 유쾌한 메리와 함께여서 그레이스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첫 생리가 터졌을 때 죽을병에 걸렸구나 울먹이는 그레이스를 안아주고 생리 용품을 준비해 주던 메리, 남자들은 죄다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던 메리, 사과껍질을 던져 미래의 남편 이름을 점쳐주던 메리가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명랑하고 장난기 많던 얼굴은 표정을 잃어가고, 그레이스의 장난에도 퉁명하다. 어느 날 메리가 그레이스 앞에서 갑자기 구토를 한다. 임신을 한 것이다. 아이의 아빠(주인집 아들)는 메리를 협박하고(이 사실을 알릴 시 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너는 쫓겨날 것이다), 모욕한다(아이의 아빠가 나인지 믿을 수 없다, 너는 모든 남자에게 다정하지 않느냐? 구원받고 싶거들랑 물에 빠져 죽어라). 누군지 밝힐 수 없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버림받은 메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아이를 낳는다. 이 경우엔 직업을 잃게 된다. 어느 집에서도 메리를 하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몸을 팔아 아이를 키우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둘째, 남자의 말대로 물에 빠져 죽는다. 셋째, 아이를 지우고 하녀로 계속 살아간다. 메리는 낙태를 결심하고 수술을 받지만 수술 부작용으로 하루 만에 숨을 거둔다. 메리의 죽음과 함께 그레이스의 행복도 끝이 난다.

episode 3. 또 다른 하녀.

메리의 임신에 대한 책임이 자신의 아들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집주인은 그레이스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그의 아들은 이제 그레이스에게까지 치근덕거린다. 그러던 중 낸시(안나 파퀸)가 나타난다.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 독신남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낸시는 신분에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그레이스에게 후한 임금을 약속하며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주인집 아들로부터의 탈출, 후한 임금, 메리를 연상시키는 낸시의 다정함에 끌려 그레이스는 토론토를 떠난다.

 특별히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집에서의 생활 역시 고단하다. 하녀보다 낫다고 해도 역시 가정부에 불과한 낸시가 안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그레이스는 혼란스럽고, 의지할 상대가 없는 것이 외롭다. 그래도 아침부터 밤까지 그레이스는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episode 4. 홀로 목욕하지 말지어다.

키니어의 방에는 구약성서 외경에 있는 수산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있다. 그레이스는 수산나의 이야기가  여자가 정원에서 혼자 목욕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알려 준다고 말한다. 남자가 여자를 탐하면 그 죄가 바로 여자에게 있다고. 이 믿음이 그레이스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낸시가 신분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안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키니어 경과 잠자리를 하기 때문이라고 낸시와 앙숙인 일꾼 맥더못은 말한다. 그가 앙심을 품고 낸시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생각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살이 찌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낸시를 보면서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레이스의 의심은 낸시의 임신 증상과 함께 확신으로 바뀐다. 메리와 똑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메리는 죽고 낸시는 호의호식하며 살아있다. 이때부터 낸시에 대한 그레이스의 감정은 미움과 분노로 변한다. 그레이스의 변화를 눈치 챈 것일까? 아니면 어리고 아름다운 그레이스가 불안했던 것일까? 낸시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며 그레이스와 맥더못을 쫓아내려 한다.

episode 5.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맥더못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그레이스가 자신을 꼬드겨 살인을 사주했다라고 진술했다. 또한 그녀가 질투심이 많은 사악한 창녀라고 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 조던은 그녀에게서 사악한 요부로서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레이스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날의 기억은 사라졌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도망치는 마차에 앉아있었다고. 유죄여부를 떠나 어린 나이에 그레이스가 겪어야했던 수많은 고난에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연정도 품게 된 조던 박사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분석하지만 사라진 그날의 기억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episode 6. 세 번 물을 건너고, 큰 고난을 겪은 뒤 이름에 J가 들어가는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막다른 길에 도달한 조던 박사는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다. 제롬 뒤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최면술사는 한때 제러마이어라는 이름의 보따리장수였다. 그레이스가 토론토에서 하녀로 일할 때 그녀의 손금을 읽어준 남자이기도 하다. 그는 그레이스에게 크나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했다. 물을 세 번 건널 것이고 결국엔 다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의 최면에 빠진 그레이스는 평소와 다른 요상한 말들을 내뱉는다. 자신이 낸시를 죽였고, 죽여 마땅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메리라고 말한다. 조던 박사는 더 큰 혼란에 빠지고, 정신 감정을 포기한 채 미국으로 떠난다.

 다시 11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사면된다. 열여섯의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 27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세상으로 나온 그레이스는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누군가는 이름에 J(사과껍질로 미래 남편의 이름을 점칠때 나온 알파벳이다)가 들어가는 남자일까? 과거의 고달프고 힘겨운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그레이스는 살아갈 수 있을까?


조던 박사와 면담을 하는 시간 내내 그레이스는 바느질을 한다. 한땀 한땀 완성되어가는 그녀의 퀼트 이불처럼 그녀의 이야기도 조각조각 이어진다. 살기 위해 천일 밤 다른 이야기를 지어낸 세헤라자드처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위해 이야기 조각을 이어 붙인다. 어느 조각은 사실일 것이고 어느 조각은 거짓일 지도 모른다.


실화에 상상력을 더한 허구인 동시에 19세기 하녀의 삶이, 농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르포타쥬로서 <그레이스>는 그레이스의 진술과 회상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심리스릴러 장르의 특성을 살려 그녀가 진짜 살인자인지 아닌지, 그녀의 차분하고 신비로움이 진짜인지 연기인지 관객을 헷갈리게 하면서 몰입시킨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유죄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혹한 삶을 통해 우리의 역사, 약자들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추신.

소설이 원작인 만큼 그레이스의 나레이션이 문학적이다. 과거와 현재, 상반된 기억들이 충돌하지만 이야기는 깔끔하고 촘촘하며 차분하고 단정한 영상과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가 관객의 몰입을 끌어낸다. 직접적이지만 노골적이지 않게 우아한 방식으로 19세기 약자들의 삶을 그려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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