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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Feb 04. 2021

1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Planning

https://www.youtube.com/watch?v=1dNZQmgaLMc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 내 키가 엄마 가슴 언저리를 맴돌던, 부엌 상부장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의자가 필요했던 그때, 내 계획은 늘 거창했다. 사실 그때 내 계획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 무식하기 그지없었는데 주로 시험 전이나, 방학의 시작 즈음에 스케치북에 동그란 시간계획표를 그려 넣으면서 뭐든 좋아 보이는, 이 정도면 멋있지 않을까? 하는 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거창한 계획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피식 나올 정도다. 가령 예를 들어 이번 시험에 올백을 맞겠다. 방학동안 매일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읽은 모든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겠다. 뭐 이런 거다. 세상에 올백이라니. 시험이 있기 하루 전날 벼락치기를 하면서 한 과목이라도 백점을 받으면 다행일텐데 올백이라니. 게다가 책만 읽으면 온 몸을 비틀어가며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절실히 느꼈던 내게 하루 2시간의 독서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과 다름없었는데 말이다.(그때는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생활계획표를 그리고 그 안에 24시간을 채워 넣으면서 막막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많은 어린이들이 그랬을 거다. 달리 뭘 할 게 없는 일상. 그래서 마구잡이로 학생이라면 응당 해야 할 법한 그런 계획들을 그냥 집어넣은 거다.) 그때의 내 계획이란 그랬다. 지켜질 수도 없고, 지킬 생각도 없었던, 계획을 위한 계획. 신기한 것은 내가 세운 계획들을 실행해 나가면서 얻어지는 성취감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내가 꽤나 자신감 있는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자랐다는 점이다. 10대 때에도 나의 터무니없는 계획은 계속되었다. 이때는 주로 시험 한 달 전부터 공부를 한다, 혹은 살을 몇kg을 빼겠다. 뭐 이런 계획들이었는데 역시나 뭐, 뒷말은 생략한다. 결과가 뻔한 실패를 수십 년 반복하고서 이제 내 계획은 결과가 아니라 실행에, 아주 사소한 행위들에 집중한다. 쉽게 말해 그날그날 해야 할 일들을 종이에 쓰는 거다. 청소하기, 쓰레기 버리기, 옷 정리하기, 운전면허필기예상문제 50문항 이상 보기, 조깅하기, 심지어 일기쓰기 이런 것 까지 적는다. 사실 이런 일들은 그냥 하면 되는 일들이다. 하루에 일정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일들이다. 그래서 대부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시놉 완성하기, 캐릭터 구체화하기, 플롯 수정하기, 뭐 이런 것들. 수달 째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일과 글쓰기 사이에서의 균형 잡기는 차치하고서)조금 진행되나 싶다가 도대체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힘 빠지고 의심만 하게 만드는 것들이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운동과 일상의 단순한 미션들 덕분에 내 몸과 정신이 버티고 있다.

2021 계획을 세우면서 2020과 크게 다르지 않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이 들었나? 다행인 동시에 속상한 마음. 살아있는 동안 마침표는 없는 거라고, 어제의 목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은 오늘. 어제의 기쁨은 어제에 머물고 있는데 어제의 고민은 오늘까지 이어지는 항상 피로한 이 기분. 1월에 칭찬하고 싶은 일은 드디어 7km 달리기를 했다는 거다. 원래라면 이즈음 10km달리기에 성공했어야 하는데 날이 추워지면서 조깅이 뜸해졌다. 그래도 유튜브를 보면서 홈트레이닝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니, 잘 하고 있어! 

2월에도 1월과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낼 예정이지만 제발 이번 달에는 글을 좀 많이 썼으면 좋겠다. 


<라우디스트 보이스>

보는 내내 기분이 더러웠다. 보는 내내 로저 에일스를 연기하는 러셀 크로 얼굴을 쥐어 패고 싶었다. 로저 에일스(폭스 뉴스 CEO로 성추행, 성폭행으로 고소를 당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라는 실존 인물을 다룬 드라마인데 이런 인간이 한 명 등장함으로서 세상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민주주의 안에서 그 어떤 사회 이념을 가지든(파시즘 빼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표현의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악용하기 쉬운 요즘 같은 시대(sns 가짜뉴스, 그 전파력과 영향력을 생각하면)에 그 어떤 윤리적 기준도 없이 오직 결과만을 위해 선을 넘어버리는 것에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로저 에일스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으로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다. 언론인의 소명 따위 개나 주라지! 설마 이렇게까지? 그 선을 넘는 인간이 바로 로저 에일스다. 인간의 저급한 본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인간이 언론인이니, 그의 역겨움은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는 방식, 특히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엔 수많은 로저 에일스 주니어들이 존재할 것이다. 항상 존재해 왔으니까. 그처럼 유능한 인간들이 아니길. 그래서 그들이 망쳐놓는 사회가 그나마 최소한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인간들을 만났을 때는 싸워서 이기든지 아니면 인간적으로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크>

드라마속 주인공들이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개고생하는 이유가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세계가 만들어 낸 균열 때문이라니!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 존재, 사랑을 지워야하는 그 받아들임의 과정. 꽤 철학적이고 흥미로운 설정들이 있지만 너무 느리다. 대사 한마디 하는데 무슨 시를 읊는 것도 아니고. 매회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답답하나 영상(미장센, 촬영, 특수효과)은 인상적이었다.


<투더레이크>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한다. 전염 속도는 제어가 불가능할 만큼 빠르다. 정부는 모스크바를 봉쇄하고, 주인공들은 가까스로 모스크바를 빠져나가 호숫가에 있는 섬, 안전한 곳으로 향한다. 이런 재난 이야기의 구조는 사실 다 비슷비슷하다. 착한 사람, 적당히 착한 사람, 적당히 나쁜 사람, 진짜 나쁜 사람, 무능한 정부, 희생양, 등등등. 결국 이야기를 다르게 하는 것은 앞서 얘기한 역할들을 맡은 인물들의 개성일 것인데 <투더레이크>는 그런 점에서 크게 흥미로운 점은 없었다. 뻔 한 얘기라도 잘 만들면 상관없는데 <투더레이크>는 살짝 어중간하다. 러시아의 대자연, 그 아름다움, 잔인함, 공포가 극의 흥미를 더하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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