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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Mar 04. 2021

2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노메이크업으로 살기

https://www.youtube.com/watch?v=oXqPjx94YMg


화장을 하지 않은지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마스크에 묻어나올 수 있는 화장품. 그러니까 파운데이션이나 비비크림, 립스틱이나 립글로스를 바르지 않고, 썬크림으로만 외출 준비를 마무리했다는 말이다. 스무살 이후로 이렇게 긴 기간 동안 화장을 하지 않은 적은 처음인데 그동안 화장은 내게 즐거움과 스트레스를 함께 주는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행위였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결을 정돈, 잡티를 가리고, 아이섀도와 펜슬로 눈두덩이에 음영을 주어 눈을 더 크고 선명하게, 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화사하거나 그윽하게 변화를 준 다음 깔끔하게 각질이 정리 된 매끄러운 입술 위에 눈화장과 조화를 이루는 립스틱을 바르는 데까지 빠르게는 십분, 어떤 날은 삼십분 이상을 필요로 한다. 화장은 꽤나 수고스러운 일(지우는 건 또 얼마나 귀찮은지!)이지만 화장을 하고 달라진 내 얼굴을 보면서 묘한 만족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화장을 한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이라는 착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외출 전 화장이 의무화가 되면서 맨얼굴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하루의 운이 거울 앞에서 점쳐지고 만족과 자괴가 깔끔하게 그려진 아이 라인 하나에 왔다 갔다 한다. 

얼마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색조화장품을 모두 버렸다. 화장 하는 게 질려서, 혹은 탈코르셋의 일환으로 화장품을 버린 게 아니라 지난 일 년 간 화장을 하지 않은데다가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마스크 의무화가 풀리지 않는 한 화장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화장품의 유통기한을 생각해서, 그래서 버린 거였다. 나름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신경 써서 구입한 내 재산이었기 때문에 속이 쓰리면서도 스스로 한 단계 발전한 듯한 희한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편안하고 당당한 기분으로 맨얼굴로 출근을 하고, 맨얼굴로 외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맨얼굴은 언제나 완전하지 못한 상태, 부족함을 의미했고, 그런 마음은 나의 표정과 말투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코로나가 터지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화장을 못하는 것이 마스크를 쓰는 답답함 보다 내게는 더 큰 걱정이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화장을 했을 때와 아닐 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제적인 맨얼굴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마스크를 쓰고도 화장을 할 수 있지만 마스크에 화장이 묻어나는 것이 맨얼굴보다 더 싫었기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결심’이라는 단어를 쓰니 화장 안 하는 게 뭐라고, 뭔가 대단한 결정 같지만 사실 대단한 결정이 맞다. 십 수 년을 화장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외출 전 항상 하던 행동을 생략하는 것이니 말이다. 

만약에 마스크라는 가림막이 없었어도 내가 화장을 멈췄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서 출근 준비시간이 짧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하루가 더 길어진 것은 아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서 거울을 보는 시간이 짧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더 건설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서 화장품 구입도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돈을 저축하는 것 또한 아니다. 화학제품을 얼굴에 덜 바르니 피부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피부상태는 오히려 더 나빠졌다. 피부트러블의 원인인 동시에 가림막이 되어주는 마스크의 아이러니라니! 지난 일 년 간 화장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내 외모에 자신감을 더 가지게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맨 얼굴이 부끄러워 힘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시작은 대단한 결심이었지만 결국엔 별 거 아닌 일이 되었다. 반복된 꾸밈의 간소화가 변화를 준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 사실 내 인생에 별 상관 없는 사람들이 내 기분에 미치는 영향에 개의치 않게 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간혹 화장을 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마스크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면 붉은 립스틱을 사야지. 출근 전 마스크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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