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4등'리뷰 - 새장의 크기를 넓혀서 날고 싶은 새의 이야기
자유롭게 날고 싶은 소망을 날개가 있는 새에게 투영하곤 한다. 날개가 없는 인간에게 새는 어디든지 하늘을 날아 이동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 그 소망을 이룬 사람은 말 그대로 새처럼 날지는 못하더라도 자유로운 인생을 실현한 모습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자유라는 건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 만으로 자유로운 걸까. 12살 주인공인 준수는 수영을 좋아하지만, 수영대회만 나가면 4등밖에 못해서 엄마에게 혼나고 코치에게 폭력을 당한다. 소년은 자유에 대해 고민한다. 영화 '4등'은 2000년대 한국에서 태어난 한 소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4등'이라는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영화이지만, 뻔한 메시지를 뻔한 이야기 구조로 관객에게 전시하지 않는다. 2000년대 즈음 태어난 자녀를 둔 부모가 큰돈을 들여서 예체능 계열 교육을 시키는 것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목적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지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관객에게 4인으로 구성된 가족의 상황을 현실과 비슷하게 재현하고 있다. 제작진은 '폭력은 나쁜 것'혹은 '성적 지향주의는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과 같은 선 해 보이고 당위적인 메시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강박 없이 만들어진 이야기에는 있을 법한 뒷바라지하는 엄마 역할, 윽박지르는 수영코치 역할이 그럴싸한 대사들을 내뱉고 있다. 그 두 어른을 감당해야 하는 소년 또한 억지로 설정된 사건을 겪으며 불필요한 고통을 위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소년이 미래에 바로 눈앞에 둘 체육특기자 중학교 진학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코치가 왜 메달 획득에 목매는지 짐작케 만드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4등'이라는 숫자가 자식을 예체능 종사자로 키우려는 한 집안에게, 수영을 그저 좋아하는 한 소년에게 어떤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체험을 주는지는 이미 명확하다. 그래서 얼마나 등수를 우선시하는 사회분위기가 나쁜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더라도 충분했던 것이다. 대신 실제로 있을 법하게 묘사된 한 소년에게 감정이입을 한 번 하는 것 만으로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속하지 못하는 슬픔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상황에 몰입시키기 위해 집중한 것은 인물의 행동 동기이다. 인물들이 4등짜리 초등학교 수영선수를 어떻게 대하고 있고, 그 반응과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는 수영이든, 공부 성적이든 자녀에게 1등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에게 일방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 문제점을 짚을 수는 있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칼을 댄다는 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불문율이라는 분위기가 살벌하게 퍼져있다. 자식만이 자신의 희망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익숙한 재현인 것이다. 한 편에는 국가대표 출신에 아시아권 국제대회에서 신기록도 세우던 수영코치의 안타까운 내리막 과거가 있다. 스포츠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순간에 자신의 자만심이나 정신력의 문제로 일을 그르쳤던 것이다. 수영코치는 바로 그때 폭력적인 지도를 통해서 정신 차릴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부재했음을 아쉬워한다. 경기 기록뿐만 아니라 나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써 폭력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시대에 어디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하지 않다는 게 명제처럼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에서 폭력은 '사랑'과 동의어로 쓰였던 언어였다. 수영코치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줬던 스승이 부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다음 세대에 태어난 재능 있는 선수에게 본인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지금이라도 주고자 폭력을 행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엄마와 수영코치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주인공 소년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행동의 동기가 바뀌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12살이라는 설정에서 본인이 1등을 하지 못했을 때의 미래를 상상하는 건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비싼 수영 강습비, 운동에 투자한 시간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선행학습 공부, 대학 진학률이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확률은 소년의 엄마가 대신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노력해도 기록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 맞을 만한 짓이라는 코치의 언행도 처음에는 거부감 없이 수용해버린다. 그저 어렴풋이 1등을 하면 엄마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수영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추론까지 도달한 셈이다. 일단 수영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만큼은 명확하고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확신을 가진 상태일 뿐이다. 반면 1등을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동기는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식의 동기보다는 동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코치를 불러들인 것이다.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치는 폭력을 시전 한다. 사랑의 매를 맞힌 후에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옛날 어른처럼 분식집에서 사랑을 담은 튀김 세트와 핫도그를 먹인다. 그 튀김을 먹으면서 '간절함'에 대해서 연설한다. 1등을 하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소년에게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동기와 상관이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맞은 상처 부위를 부모에게 감추면서 코치와 계속 함께 하려고 했던 이유는 폭력을 사랑과 헷갈린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받았던 건 괴롭힘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코치의 강도 높은 수위는 1등을 하지 못했을 때의 참혹한 현실을 겪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참혹함을 미리 겪은 스승으로서 제자는 겪지 않도록 사랑으로 지도해주는 게 아닌가라는 혼돈이 생긴다. 흔들리는 와중에 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4등이 아닌 2등을 달성하는 동기는 역시 코치를 만난 이후에 생겨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이다.
소년이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을 이유는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다가온다. 아이가 맞을 짓은 없다는 교육 철학을 가진 아빠 덕분이었다. 아빠가 직접적으로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고 약속까지 받아냄을 목격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고 다시 훈련을 잘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체벌을 당하자 소년의 입장에서는 해볼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막혔다는 생각에 잠겨버린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메달이 필요해서 메달을 딸 수 있도록 하는 코치를 만났다. 그 코치가 아니면 다시 4등이 돼서 수영을 계속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존재한다. 동시에 코치에게 맞을 이유는 없다는 더 큰 혼란을 겪는다. 막다른 길에 봉착한 소년은 그토록 좋아하던 수영을 관두는 것 말고는 혼란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수영 하나 만을 좋아했던 소년에게 어른들의 태도는 넘어설 수 없는 큰 벽으로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영을 그만둔 이후에 남동생이 벌인 귀여운 장난에 코치에게 배운 대로 "몇 대 맞을래? 네가 정해.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자."라는 대사와 함께 체벌로 응수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수영을 빼고 남은 건 폭력의 학습이었다. 코치가 소년을 체벌할 때는 '네가 잘 되도록 지도해주는 의도'라는 근거 없는 논리에 따른 코치 만의 명분 있는 폭력이었다. 하지만 소년이 남동생을 체벌할 때의 동기는 논리도 없고 명분도 없는 그저 분풀이에 가까웠다. 코치는 30년 넘게 살면서 후회 속에 자신의 과거에 폭력으로라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혼자만의 통찰을 얻었고, 그 폭력이 충분히 가능하다 못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세월에 대한 이해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폭력을 당한 소년은 적합한 인과관계없이 폭력 자체가 정당하다는 그릇된 생각을 배운 것이다. 수영을 좋아하지만 4등밖에 못하는 소년에게 남은 건 남동생을 향한 이유 없는 폭력이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학원 폭력의 불편함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크게 다가왔을 테지만, 결말에서 소년의 성장을 통해 폭력의 폐해를 넘어서는 서사를 완성한다.
남동생을 때린 장면 이후에 소년은 새벽에 혼자 수영장을 찾아가 허락도 없이 도둑 수영을 하다가 들켜버린다. 정해진 레인을 따라서 수영을 할 때보다 레인을 넘나들고 물속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낸다. 소년의 몸짓을 보는 관객도, 주인공 본인도 얼마나 수영을 좋아하는지 느끼게 만든다. 도둑 수영이 걸린 이후 3가지 장면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유롭게 수영했을 때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신한 소년은 "너 왜 그래?"라는 엄마에게 1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중요한 건 맞아서라도 1등을 하는 건 좋지 않다는 깨달음의 행간을 넣었다는 것이다. 국밥집에서 돈도 안 내고 도둑 식사를 하고 있는 코치에게 혼자 쫄래쫄래 찾아간 소년은 1등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대신 맞지 않고서도 코치의 지도를 받고 싶다는 약속이 필요했다. 코치는 그때 소년이 수영을 정말로 사랑해서 1등을 통해 그 사랑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간절함'을 읽는다. 코치 본인의 어린 시절, 수영이란 생존이라는 간절함과 같았지만 소년에게서는 좋아하는 것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재능이 보였다. 소년의 내면에서 생긴 순수한, 강력한 동기는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1등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제한하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마음이었다. 몸은 레인 위에 있겠지만, 시합이 끝나고 등수는 매겨지지만, 외부적인 틀에 나를 위치시켜놓지 않고 내가 만든 틀에 내가 존재하게끔 성장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그 의지가 깃든 눈빛을 드디어 발견한 코치는 자신이 선수 시절 쓰던 수경을 보물이나 수여한다는 듯 전달한다. 그 수경을 쓰고 자신과 같이 좋은 성적을 내길 내심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회 당일 날, '나'의 틀에서 존재하기 시작한 소년은 코치가 준 수경이 아닌 자신의 수경을 쓰고 대회에 출전한다. 소년은 결국 엄마의 도움 없이, 걸출한 코치의 훈육 없이, 그리고 과거의 영광에 대한 답습 없이 본인만의 의지로 스스로 성장한다. 소년의 성장이 눈부신 이유는 스스로의 동기를 속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동기가 극 중 어른들의 것보다 순수하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에 소년의 남동생의 목소리로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가 낭독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앞날에 살고
지금은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니"
소년의 엄마의 마음은 앞날에 살고 코치는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어른이다. 그들의 슬픔이 소년을 속이고 또 속이려 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코치와 소년이 처음 만난 날, 코치는 소년에게 수영을 왜 하냐고 묻는다. 소년은 소심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놀려고"라고 답한다. 코치와 소년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 코치는 소년에게 1등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고 묻는다. 소년은 또 소심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아니요"라고 답한다. 어른들을 의식해서 말하지 못한 소년의 마음속에 수영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로 좋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4등만 하다가 코치를 만나고 좋은 결과가 나오고 인정까지 받은 이후로는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재능은 다른 경쟁 상대와 비교해서 월등히 좋은 신체조건이나 수영 능력보다는 유려하게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영 폼에 해당했다. 삶이 소년을 속이지 않는다면 즐겁게 수영하는 날이 오게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를 두고 엄마는 무슨 행동을 저지르고 코치는 어떤 태도로 소년을 가르치려고 했는가.
엄마가 가지고 있는 1등 우선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욕심이 빛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를 속여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소년이 메달 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등보다는 수영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한 체 서로 같은 목표를 세웠다는 조작된 합리화를 시도한다. 소년에게 1등과 메달은 수영을 지속하게 만드는 수단인 반면, 어떤 이유에서건 엄마에게는 목적이자 최종 목표인 셈이다. 엄마가 종교시설에 찾아가서 남편과 자녀에 대한 꿈과 소망을 빌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소망은 없다는 걸 밝힌다. 이 장면을 통해 엄마라는 인물이 가진 뒤틀린 합리화가 본연의 정체성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엄마에게 있어서 소년이 1등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장차 "사람 구실"을 하면서 "인생이 꾸리꾸리"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 시설에서 엄마 자신의 소망은 없다는 걸 솔직하게 드러낸 바와 같이 그녀 본인의 미래가 꾸리꾸리 하게 초라해질까 봐 두려워진 것이다. 엄마는 소년이 코치에게 맞으면서 훈련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소년이 "맞으면서 까지 1등을 하면 좋겠어?"라는 말에 울기만 할 뿐 다른 답은 하지 않았다. 엄마의 비극은 1등이 아닌 4등인 자식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영화 내에서 4등이기 때문에 소년이 불이익을 받았다거나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대해 초조해하면서 생긴 불안과 걱정을 소년에게 되묻는다. "너 왜 그래?"라는 대사는 1등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교육하는 게 아니라 조작된 합리화가 풀리지 않길 바라는 믿음의 강조를 반복하는 것이다.
코치의 캐릭터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과거는 국내 최고 엘리트 선수 시절, 본인 잘못에 대해 받은 체벌이라는 악습을 받게 된 과정이다. 결국 매질을 하는 국가대표 감독은 언젠가 체벌을 가한 사람에게 고마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곁들인다. 체벌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만약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제자에게 좋은 스승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까지 고려한 것이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이 총체적인 경험을 물려주고 싶고 그 이유는 매를 맞고 있는 너의 미래를 위한다는 것이다. 매를 맞을 당시에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 수영을 관두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국가대표 선수촌을 떠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초라한 수영코치가 되어 있는 현재에서는 소년이 정신 차리고 더 나은 사람으로 훈육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라는 대사는 언젠가 체벌을 가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는 코치의 스승을 전승하려는 태도의 표출인 것이다.
엄마와 코치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4등이라는 불행이 아니라, 스스로와 상대를 속이는 말과 태도가 결국 자신을 진정한 패배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엄마가 4등만 하던 소년이 메달에 관심이 없어하는 걸 인정했다면, 코치가 정말로 체벌을 통해서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신념이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했다면,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어른들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1등, 더 나은 가르침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숨어서 가짜 삶을 축적할 뿐이다. 엄마라고 해서 자식에게 1등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또 선생이라고 해서 제자가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도록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더더욱 찾기 어렵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의 이치를 통일시킨 건 소년이었다. 슬픈 날을 참고 견뎌 즐거운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폭력도 메달도 필요 없다. 그날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노력이면 충분하다. 그 동기가 나의 진정한 즐거움이면 한계는 극복할 수 있다.
소년은 수영장 레인이더라도, 그 안에서 자유롭게 수영할 때 가장 즐거워했다. 수영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조금의 재능이 있는 건 새의 날개가 달려있는 것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수영 때문에 엄마에게 치이고, 코치에게 맞으면서 날개가 달려있다고 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보게 된다. 정말로 자유로운 새가 상징하는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선 날갯짓을 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 왜 수영을, 날갯짓을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레인이라는 곳에 선이 그어져 있다고 해서, 순서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나를 얽매이도록 스스로를 속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레인이 있든 없든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수영장은 소년에게 더 넓은 새장처럼 확장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구조에서 어떤 싸움을 견뎌낼지 선택하는 건 쉽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계를 넘어서 확장하는 건 어렵고 외로울 수도 있는 일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새장 같은 세상에서 1등을 왜 하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자유롭게 날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