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평전'을 통해 읽는 비평과 비평가가 갖는 의미 발견하기
벤야민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삶이 전설로 각색되는 단초로 사용되어 왔다. 그의 30대 후반과 40대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기로 읽힌다. 그 소용돌이의 시대의 가운데서 태어난 역작들은 필생의 의지가 담겼으리라는 믿음을 부추긴다. 그 외에 유대인, 아웃사이더, 마르크스주의자, 문화비평가라는 상징적인 직함들은 저절로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인생을 서사화한다. 이러한 사후적 해석은 1980년대 초 벤야민의 관한 대중적, 학술적 담론을 통해 서구권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와 관련된 학문들(예를 들어 영화, 미술, 문학, 미학 등)의 입문자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언젠가 벤야민의 이름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벤야민은 실제로 살아 있을 당시에 대중들이 보는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구와 이론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정도로 각광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대중들에게는 벤야민의 삶에 왠지 모를 연민이 담겨있는 시선이 있다. 역설적으로 죽고 난 이후 몇십 년이 지나서 생긴 그의 아우라가 그의 삶에 비해 더욱 비대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넓은 범위의 분야에서 그의 이론과 주장을 인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평을 하나의 장르로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큰 단위의 역사는 어떤 사조나 학파에 한 사람의 작업이나 사상을 넣어서 제단 하듯이 이해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초점을 좁혀 바라본 벤야민 본인의 삶은 홀로 멀리 떠난 여행의 와중에 서 있었다. 떠나온 길을 다시 돌아봤을 때, 그 곁에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동료와 친구가 있을지언정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똑같은 연구를 실험하는 집단이나 연구자는 없었다. 예술가의 인생 이야기처럼 들리는 익숙한 패턴과 벤야민이 글을 쓰는 동기와 목적은 주변 사람들과 남긴 편지를 통해 읽을 수 있다. 크게 3 부분으로 나뉜다. 대학에서 문화철학을 전공하며 청년과 교육을 주제로 삼은 시기가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1차 대전의 여파로 직접적인 사회참여 활동을 줄이고 대학에서 미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 때다. 마지막으로 교수직을 쉽사리 쟁취하지 못하면서 학계에서 벗어나 학문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문화 전반을 주제로 삼은 후반부가 있다. 언뜻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글의 주제를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관심사들을 '비평'이라는 큰 테마로 묶어 모든 것을 쏟아냈다고 읽을 수 있다.
벤야민이 젊은 시절 청년과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0대 청소년 시기에 만난 한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몸 자체가 병약하고 결석도 자주 했던 그는 도시 베를린에서 비싼 시골 기숙학교로 전학을 가서 2년을 보낼 수 있었다. 구스타프 비네켄이라는 교육개혁가는 선생으로 학교에서 재직하면서 벤야민에게 독일 문학을 가르쳤다. 청년들은 예술과 철학을 공부해서 문화를 살아 있도록 고취시키고 일종의 해방을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사람이었다.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립을 이루기 전 벤야민은 비네켄의 말에 따라 시와 문학을 낭독하는 모임을 주도하고 심리학, 사회적 질문 등에 관심을 키웠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이러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철학을 전공하며 역사적 문화적 주변부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한편, 청년에 대한 운동을 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화 문화를 중심으로 질문과 토론의 공간이 열리는 것을 소망으로 삼았다. 하지만 모든 가치관과 인연의 중심이었던 청년 운동은 1차 대전 발발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다.
벤야민의 청소년 시기에 적잖은 사고의 틀을 제공했던 선생님 비네켄과의 절교가 상징적이다. 1914년 11월 독일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베를린 카페에서 만나 자유롭게 학문적 교류를 나누던 가까운 친구 커플이 반전 시위를 목적으로 자살한 것을 지켜보는 경험 역시 청년운동과 연을 끊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다. 일련의 1차 대전 관련 사건들을 연속으로 경험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정치나 전쟁에 대한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죽은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프리드리히 흴덜린이라는 시인의 작품들을 비평하는 글을 썼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존 학계의 미학 범주 체계를 거부하며 본인만의 이론적 여정을 시작한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기존의 구분을 초월하고 작품의 분석을 통해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발칙한 논의를 던진 것이다.
베를린 자유총학생회라는 운동단체의 회장까지 역임했던 벤야민은 문학비평에 대한 야심과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큰 전화적 경험을 통해 청년운동과는 결별을 맺는다. 그의 왕성한 독서와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는 동기는 전쟁을 피해 스위스에서 이어진다.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별개로 아내, 친구, 또 친구의 친구들을 끊임없이 사귀며 토론하고 대화하고 편지를 쓰는 일상은 죽기 전까지 지속했다. 징병 유예를 연속으로 받으며 전쟁이라는 큰 혼란에서 벗어난 벤야민은 생계, 가족 부양 등 실리적인 목표보다 자신의 이론 여정을 넓히고 파고드는데 몰두했다. 벤야민의 독일 낭만주의 예술비평은 그의 토대가 되었다. 관념론적 철학 연구, 문화예술과 시각예술을 인식 매체로 보는 연구, 신화연구, 역사 철학 연구를 하나로 모은다는 개념은 그의 모든 작업에서 특징지어진다. 1919년 완성한 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 예술비평의 개념]은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세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계에 속한다. 비평이란 예술작품이라는 '원작'에 후견 되는 부속품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비평을 통해 작품 내 반영된 진리 성분을 읽도록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 대상을 파괴하면서 접근하는 형식이다. 작품의 성분을 하나하나 떼어내서 분해해야 만 다시 건설할 수 있고, 그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성분들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적 비평의 예고편에 속하는 이 문제작은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구직에 실패하고,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는 시간은 진로를 전면적으로 뒤트는 배경이 된다. 스위스에서 독일로 돌아와 4년 정도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에서 교수들과 인맥을 쌓는데 노력하지만 성사된 건은 없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재산을 잃게 된 벤야민의 부모와도 갈등이 불거졌고, 집안에 큰 책임을 지지 않은 탓에 결혼한 아내와 아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1923년은 망가진 생활과 생계에 독일의 혼돈이 정점을 찍었다. 인플레이션 악화, 반유대주의 폭력 사태,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1차 대전이 처음 발발했을 당시,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글을 쓰기보다는 [독일 비애극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쓰고 교수자격 심사를 받기 위해 제출했다. '역사'라는 것을 비애극의 무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전개를 펼친 만큼 현실 속에서도 비평 세계의 여정이 더욱 확고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벤야민의 비애극 연구는 학계로부터 모조리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벤야민은 학계와 결별 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이동해해야 했다.
벤야민은 연구 대상을 대중문화로 초점을 점진적으로 옮겨갔다. 그 가운데서도 놓지 않았던 사유는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찰하는 것이었다. 초기 과정에서 농담, 꿈 내용, 도시 풍경, 작품 매뉴얼, 정치 분석, 아동 심리, 부르주아 계급 유행, 등에 대한 글과 해석은 일상적 사물들을 소재로 삼았다. 이러한 시도가 생애 처음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는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벤야민은 1925년 8월 '프랑크푸르트 동요 선집'을 싣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편의 길고 짧은 기사와 문예란 기사를 실었다. 여행, 도시 산책, 예술 작품 감상은 모두 그의 글 소재와 주제가 되었다. 학계로부터 거절당했던 [독일 비애극의 기원] 또한 출판되면서 좋은 반응과 평가를 얻었다. 그동안 쌓아온 비평에 대한 스스로의 여정이 글 안으로 녹아들면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 성공에 큰 요인이었다. 대중문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그의 강점이었다. 개인으로서는 탄탄한 밑바탕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짧은 전성기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던 건 외부 환경 때문이었다. 정점기에 있었던 1929년에는 아내와 이혼을 했고, 1930년에는 히틀러의 집권으로 경제 위기에 생계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부터 1940년까지는 파리와 여러 망명 지역을 전전하면서 다닌 피난과 도망의 역사다. 언론사의 내리막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상황은 벤야민의 정신을 압박했다. 파리 망명 생활 중에서도 경제와 정치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현실 비판보다는 문화, 문학, 역사에 대한 비평 이론 글을 쓰기를 원했고, 어느 정도 진행을 해낸다. 벤야민은 죽기 몇 년 전까지 보들레르의 시와 관련된 작업을 놓지 못했다. 성인이 될 무렵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벤야민에게는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문화에 대한 탐구의지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출발한 이 의지는 문화에 대해서 꼭 해야 할 말을 어떻게든 서술해내겠다는 여행의 목적으로 읽힌다. 벤야민을 둘러싼 정치적 역동과 소용돌이는 시끄럽고 극적이었지만, 하나의 진일보한 결과물을 완성하고자 하는 열의는 고요하고 담담했다. 멀리 떠나온 지점에서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또 다른 학자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닌 본인으로서 벤야민이 되어야겠다는 감정이다.
비평가로서 가장 중요한 행동은 쓰는 행위이다. 발터 벤야민 평전에서 주목하고 있는 주된 내용은 그의 억척같은 삶이다. 어려움 끝에 결국 해냈다는 성공신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드러난 삶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위로의 성격은 찾기 어렵다. 이 삶의 핵심은 쓴다는 행위이다. 이렇게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삶으로 말했던 것뿐이다. 그의 작품들 중 단박에 알아차리기 쉽게 쓴 논문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 글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와 비평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다. 정치와 경제, 또는 예술작품이라는 원본에 부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게 하는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안정된 가정이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은 후순위에 둔 삶이었지만, 정말로 비평 자체가 한 사람의 몫으로 발현될 수 있는 역사였다.
같은 시대를 살고 또 망명 계획까지 함께 세울 만큼 가까웠던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가 있다. 전쟁통에서 살아남아 현실 속에서 느낀 통합적인 감정과 이론을 토대로 독일이 만든 현실을 비판하고 자성하는 글을 썼다. 벤야민도 그 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비판을 가할 수 있었지만, 그가 관심을 두고 천착했던 것은 문화와 비평이었다. 감정, 인식, 관념, 파토스, 비극, 미술, 예술, 사람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사람의 목격과 사고와 역사를 통해 빚어진, 언어를 통해 구성된 것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그만이 떠나고 겪은 비평 세계로의 여행이었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읽기에는 제약이 많은 비평이라는 글 분야는 목숨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세계에 대한 해체를 통해 그 안에 남겨진 진리를 통해 역으로 그 세계가 실제로 들어맞는 역사가 밝혀지는지 뒤섞는 이 작업은 그에게 전부였다.
시대는 예술가를 만들고, 예술가는 작품을 만든다. 작품에는 모방된 시대가 숨을 쉰다. 예술작품의 핵심은 여러 대화 시도를 통해서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인지에 대해서 또 하나의 관점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예술가는 세상을 통해서 질문을 만든다. 비평가는 세상과 또 다른 예술 세계 속에서 한층 더 다면화된 창을 통해 보유한 질문을 남길뿐이다. 결국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묘사와 모습이 달리 비칠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비평가가 작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오해를 풀어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