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과 연상호 감독의 <지옥> 같이 경험하기
시인 단테가 살았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세계관이 유럽 세계를 지배했던 때이다. 로마 제국이 역사상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태어났다는 사상은 단테가 쓴 <신곡>에도 담겨있다. 로마 황제들은 인간의 원죄에 대하여 법과 정치 그리고 종교적으로 형벌을 집행하는 자였다. 그러나 로마를 포함한 인간의 질서 위반은 전쟁과 혼란을 초래했다. 교황, 황제, 당파, 성직자, 수도원, 수도회는 무질서와 부패를 저질렀다. 그중에서도 단테가 활동했던 피렌체는 특별한 곳이었다. 피렌체는 새로운 상업적 중산층 정신이 처음 개화했고, 시민들은 자의식을 가지곤 했다. 단테는 이곳을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세속적 제도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상관없이 냉정한 이해타산을 세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단테가 살아있는 때부터 성공의 기미를 보였다. 무역은 번성하고 도시인구는 늘어나고 물질적으로 흑자를 보았다. 세속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집단은 전통적 종교 질서의 유대감 앞에 우월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현세를 지배하던 종교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난리 바탕의 도시는 경쟁을 통하여 생기를 유지했다.
단테는 이 광경을 보고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넘어 <신곡>이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남겨야 했다. 지상 세계는 종교의 규칙 안에서 혼란을 멈추고 신성한 의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단순히 시인으로서의 영감에서 출발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직접적으로 교황과 맞섰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중심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종교의 평화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이념이 붕괴되는 현상이었다. 금융과 상업을 담당하는 부르주아가 상승하면서 계급 구분이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개인 권력은 도시 국가에서 교황과 황제의 권력을 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단테는 살아있는 세력에 대항했고, 기존 정치 움직임과 당파 활동에서 크게 패배하여 유배자로 살았다. 단테의 시선에서 역사의 기준은 정치의 실세가 아니라 신성하고 완벽한 세계 질서였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세력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있다고 믿고 추구했던 질서의 확립이었다.
1302년 영구 추방령을 받은 단테는 외롭고 무기력한 유배자였다.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은 정치인으로서 잃어버린 입지에 대한 유일한 해방구였다. 당시 사회에서 지적 권위는 일관된 세계관의 백과사전적 체계에 해당했다. 단테의 입장에서는 그가 놓고 싶지 않았던 사고방식에 대한 정당화가 있어야 했다. <신곡>은 이러한 배경에서 지어졌다. <신곡>은 구조와 형식적으로 단테 개인의 생애가 담긴 작품이다. 올바른 질서에 대한 강한 확신은 당대 권력자들과 마찰을 만들었다. 이러한 체험, 권력과의 대결이 세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지옥 여행 테마를 만든 것이다. <신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속적 시간과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재현을 위해 살아있는 단테가 죽은 사람을 만나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역사적 세상을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단테는 학식 있는 인물보다는 일반 대중들이 일상생활의 언어를 통해 생각과 전통의 살아 있는 가치를 나누기를 바랐다.
단테의 <신곡> 그 자체는 유명세와 인지도를 얻게 되었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미치려고 했던 영향력은 발휘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 사상과 이데올로기에서 <신곡>에 담겨있는 종교적 세계는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테 사망 이후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분노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불러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테의 세계의 겉모습만 닮아 있었을 뿐 이데올로기는 연관성이 없었다. 심지어 17세기, 18세기에 불어온 합리주의 세계관은 인간 사회에 실용성이 우선시되도록 만들었다. 그가 언제나 밀어붙이고 싶어 했던 올바른 종교 질서 체계의 세계는 역사 속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확한 사상체계는 인간과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 세계 넷플릭스 1위에 올랐던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제목과 다르게 지옥은 나오지 않고 현실 세계를 비추고 있다. 아마 현실에 존재하는 지옥 같은 모습을 목격했거나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에서 지은 제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이 <지옥>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지점은 2021년 어딘가에 있을 법한 문제들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끝까지 추적하는 장면을 담지 않았고 또 명확한 윤리 기준을 세워 선악을 판별하지는 않는다. 그 경계에 가족사와 개인사가 끼어들면서 무릎을 꿇거나 꿇릴 수 있는 에너지 자체를 화두로 삼는다. 인물들은 반응과 선택을 통해 커다란 재난에 앞에서 어떤 두려움을 숨길 수 없는지에 대한 실험체처럼 묘사된다. <지옥> 이야기의 구성과 마무리는 가족으로 회귀한다. 핏줄로 이어진 감정의 순환 끈은 지적하고자 했던 사회문제들을 집어삼키고 사건을 종결시킨다. 특정 단체 또는 집단을 연상시키는 문제의 대리인들은 비난의 화살이 쏠리게 할 뿐 발생 원인이나 통찰을 제시하는 흐름까지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인간의 죄는 단테의 <신곡>과 연상호 감독의 <지옥>에서 핵심 질문과 주제를 드러내는 열쇠다. 단테는 명확한 체계에 따라 천국, 지옥, 연옥으로 보내진 다고 서술한다.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옳은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지성과 의지로 구성된 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지옥에서 받는 죄악의 징벌을 세세하게 묘사함에 따라 보는 독자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각각의 죄악은 신적 질서에서 벗어났을 때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오히려 죄의 결과에 대해서 해석을 하는 세력이 도래한 세상을 지옥과 유사하게 그려냈다. 그 사이에 정의는 없고 대중의 믿음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 추구하는 집단이 내뿜는 공포를 묘사할 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자극제일 뿐, 사후세계를 넘어가지는 않고 있다.
단테의 <신곡> 이전, 그 이후로도 죽음 너머의 세계는 문학 작품이나 최근의 영화로 소비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세상살이의 끊임없는 화젯거리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지옥, 사후세계와 같은 소재는 결국 현실 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은 작가들이 부리는 통찰을 엿보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단테는 <신곡> 안을 경험담과 같은 여행의 기록으로 꾸며 놓았다. 순례자인 작가이자 작품 속 주인공인 단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운명의 결정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 인물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동일시하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맞이하는 위험은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부터 천국 구원의 여행에 이끌린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에서 독자들이 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여러 부분으로 분산된다. 같은 지옥을 경험하더라도 살아있는 순간에 취사선택할 수 있는 상황과 맥락의 조건을 잠그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이 현실세계의 드라마를 입힌 가상의 시공간이라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가상의 시공간에 현실세계를 모방한 드라마인 것이다. 어떤 지옥을 경험하더라도 살아있는 독자들은 기억과 경험 속에서 자신의 행동 의지를 거울 보듯 돌아보게 된다.
사실 단테는 연상호 감독이 상상한 지옥과 같은 당시 현실에서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살아남지 못한 패배자였다. 쫓겨난 단테가 선택했던 지옥 여행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위험을 뚫고 지나가 구원에 이르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신성한 의지를 수호하는 가치를 내세운다. 그가 남긴 작품이 800년이 지나오면서 그 작품성과 인지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신곡>을 통해 보려고 했던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단테가 겪었던 지옥 같은 현실은 역사 속에 늘 되살아 나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씁쓸한 결과이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 역시 커다란 재난 앞에 모든 인물들이 무참하게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 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역시나 독자들이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닌 지상세계일 뿐이다. 단테가 지상세계에서 할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증언을 더한 궁극적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연상호 감독 역시 드라마의 마무리는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지옥과 희망이 교차할 수 있는 장소가 지상세계였다면, 어떤 작품을 통해서라도 현세에 집중할 이유가 당연히 커지는 것이다. 누구는 글을 써서, 누구는 일을 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통해 지상세계의 여행을 잇는 선택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