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과 '비밀정보기관의 역사'로 아서왕 현상 분석하기
영국은 첩보 선진국이었다. 그 자신감과 자부심은 문화콘텐츠에서도 드러난다. '007'시리즈는 전설처럼 영웅을 현대판 문학 안에 내걸고 있다. '제임스 본드'는 과거의 유산을 받들어 첨단 무기를 사용한다. 결국에는 적국들과 세계를 어지럽히는 악당들로부터 그들의 조국을 지켜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첩보 영화 시리즈는 경쟁적으로 제작되었다. 미국은 실제 역사에서 후발 주자로 첩보 활동을 시작했듯이 극장가에서도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할리우드 첩보 영웅을 창조했다. 이 모든 경쟁과 우위 다툼 속에서 회심의 첩보 시리즈 '킹스맨'이 2015년에 등장했다. 이로써 영국 전통 스파이 계보를 전승함과 동시에 새로운 액션 오락 콘텐츠의 부활을 만들었다. 영상 콘텐츠물을 시청하고 관람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마음을 끌어올 수 있는 승부수였다. 신규 영화팬들은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첩보 시리즈가 아닌 지금부터 탑승할 수 있는 흐름에 올라탔다.
최근 2021년 12월에 개봉한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애써 새롭게 만든 흐름에서 벗어나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전작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킹스맨: 골든 서클'은 쿨한 액션과 시대적 수요가 업데이트된 모델이었다. 비현실적이더라도 빠르고 동물적인 액션 시퀀스와 평범한 인물이 비범한 조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되는 서사는 단숨에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느닷없이 전통과 품격을 힘주어 강조한다. 머릿속에 상상으로 만 남겨뒀던 세련된 조직의 과거보다는 최상급의 역할 수행을 신나게 경험할 수 있는 놀이터로 존재하는 '킹스맨'이 관객들이 열광했던 지점이었다. 놀이터에 칠판과 분필을 가져와 역사 공부를 시켜주는 늙은 아버지가 주인공인 것이 상징적이다. 이로써 로맨틱했던 '영화'같은 구경은 시들해지고 현실을 되짚는 대체역사 서술의 장이 열린다.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역사에는 대안적이거나 유사한 성격의 구성이 가능하다. 모든 장면을 믿게 만드는 것보다는 작가가 상상한 이야기가 실제 사실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구멍을 매워주는 기능을 할 수 있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경우에는 호기롭게 실존 인물을 코믹한 캐릭터로 조각하고 가상의 대체 역사를 만든다. 새로운 세계관 속에는 그러므로 규칙을 세운다. 모든 프랜차이즈의 팬들은 새로운 규칙을 익히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사건이 극적이지 않거나 그 자체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힘이 부족하면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허구의 세계에서 구현된 캐릭터와 세계관의 경험이 자신의 삶에 더 밀접한 영감을 주거나 자극을 느끼게 해 줄 때 마음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슈퍼 히어로가 처하는 어려움에서 행동을 이어나가는 동기와 그로 인한 결과의 인과적 배치가 마음에 든다면 훨씬 더 이입이 쉬워지는 것이다. 영상물 시청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 서 있는 현재에서도 성취감을 이어갈 수 있는 경험이 더 알차고 풍부한 선택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역사 속 인물들이 실제로 저지르고 깨닫고 얻은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의 구조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읽히는 원리다.
더 이상 국가, 가족 조직의 신념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현대인에게 즉각적으로 부러움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나 미션을 곧바로 획득하는 서사를 영화에서 찾는 현상이 스코어와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러움을 얻기 위한 조건은 소수만 획득할 수 있는 인지도나 명성을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복합적인 정치적 맥락이나 사회구조 속에서의 모순 등은 언급될 필요도가 줄어든다. 한 순간에 계급이나 신분, 처한 환경이 바뀌는 상황 연출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안심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개인들이 충분히 원하는 인지도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같은 전작이 주었던 매력은 그 믿음을 방해하지 않고 실제와 동일시할 수 있게끔 지지하는 것이었다. 전통이 가지고 있는 고풍스러운 이미지는 계승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고 출발지점의 눈높이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미 수준과 명성이 높은 조직에 합류하는 것은 평범한 배경 출신의 인물에게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명대사는 '나도 할 수 있다'와 유사하게 쓰였다. '매너'를 배울 수 있다면 중간 정도의 시민의식과 보통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진 다수의 보편적 인물들도 특별한 영화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러한 패턴은 위대한 모험을 통해 영웅이 되는 무용담이 생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매너'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믿음 체계를 공고히 하는 단어로 의미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번 신작에서는 '매너'가 쌓은 이미지를 모두 지우고 전혀 다른 정의를 또 한 번 내린다. 그것은 '나도 할 수 있다'가 아닌 '야만을 기억한다'이다. 전장에서 승리를 차지한 왕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가져가는 욕망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소신을 밝히는 대체역사가 나왔다.
애초에 스파이는 과거부터 영국 땅의 방어와 왕가를 전쟁으로부터 지켜내는 왕의 군사 중 일부였다. 영국을 둘러싸고 유럽에서 전쟁이 가장 자주 일어난 원인도 제후들 사이에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쟁탈의 심화였다. 왕의 후보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후보가 좁혀진 이후에는 전쟁의 분위기가 늘 맴돌았다.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특권, 재산, 그리고 모든 것이 왔다 갔다 했다. 이는 스파이의 뿌리가 자라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라 외적으로 경쟁 상대 국가와 전쟁을 치러야 할 때도 국가를 방어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첩보 활동이었다. 1588년 에스파냐 군인들과 해전을 펼쳤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첩보 활동에 고용되었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당시 영국에게 큰 위협이었으며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우선적인 수단이 첩보활동이었다. 시간이 흘러 전문화되고 고도화된 첩보기관을 갖춘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였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100년,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한 '빈 회의'가 개최되었다. '빈 회의'에 모인 강대국은 혁명의 기운에 맞서기 위해 왕좌 체제를 서로 연합하여 지키려고 했다. 전쟁이나 혼란을 최소화하고 왕들이 계속 정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각 국 내부에서 일어난 혁명들로 인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익에 부합하는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는 일이 더 잦았다. 이와 같은 결탁은 군사 무장과 전문화를 부추겼다. 영국을 비롯한 모든 유럽 강대국은 언제든지 동맹국이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군사적 우위를 점한 상대에게 강요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진보는 빠른 속도로 새로운 군사적 위험을 생산했다. 화력의 발전, 무기 도달거리의 연장, 현대적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성장은 정치력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불안한 정치가 할 수 있는 건 군 장비의 확장이었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불안을 증폭시키는 계기였다. 스파이 활동은 상대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만든 잠재력을 먹고 자란 군사적 전략이었다.
영화에서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스파이는 실제로 여차하면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이 날아가는 고위험 직업군이었다. 가장 강력하고 세계화되어 있던 영국 역시 1909년에야 방첩을 위한 군내정보부(MI-5)와 비밀정보청(MI-6)를 설립한다. MI는 Military Intelligence로 군사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파이들의 실제 삶은 피 튀기고 허름하고 냄새나는 역사였다. 그들이 종사해야 하는 군대는 전설 속 아서왕처럼 960명의 적군을 혼자서 물리치는 초인의 집합소가 아니었다. 영국 역사에서 아서왕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를 밝힐 수 있는 정식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수많은 전투를 이겨내고 외국의 침략을 모두 막아낸 영웅적인 군주가 실제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문학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모든 명성과 전쟁의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영국의 왕 역시 영화처럼 짜릿한 경험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많은 목숨과 전투의 고초를 맞바꾸고 살아남은 자만이 '야만'이 '매너'와 상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 막 성인 무렵이 된 귀족 가문의 아들은 직접 영웅이 되기를 원한다. 아들을 잃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무시하고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을 자처한 그에게 돌아온 건 동료의 의심이 담긴 총살 비극이다. 이러한 과정은 아서왕 문학처럼 낭만적이지도 않고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처럼 극적이지도 않은 결과다. 슬픔에 잠겨있던 아버지는 오히려 그 허무한 죽음의 의미를 '매너'로 삼는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누구도 따라 하고 싶지 않을 법한 희생을 주요 테마로 삼은 것은 확연한 시대상 또는 전작과의 단절을 뜻한다. '킹스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매력은 희생 없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아서왕이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킹스맨'이나 아서왕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영웅이 되는 환경은 기술의 진보에서 시작되었다. 언뜻 보면 모두가 각자 아서왕 영웅담 하나쯤은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인터넷 환경이다. 하지만 무한 기회의 장은 전쟁터의 성격 역시 갖추고 있다. '매너'는 그곳을 누빌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아닌 지 오래다. 전쟁 속에서 스파이가 생겨났고, 그들은 영웅이 되지 못한 대체 역사가 불려 왔다. 그들은 전투 요원이었으며 1차 대전의 젊은이들은 무의미하게 사망했다. '매너'는 잔인한 현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용서를 비는 당찬 포부로 재해석되었다. 총과 폭탄은 더 이상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스파이 업무는 여전히 전쟁 무기로 통한다. 2008년 러시아는 조지아의 방공을 차단했고, 2010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의 일부를 인터넷으로 파괴했다. 100년 전 '킹스맨'의 설립을 보여주는 건 2022년 현재가 갖고 있는 위험성의 은유로 해석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