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증언으로 기록된다. 한 개인이 겪은 과거를 경험적 토대로 삼는 건 개인사에서 필수적이다. 개인들에게는 공통적 기억이 남아 있다.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언급이 쌓여갔을 때는 시대의 역사가 된다. 통상적으로 세계사나 각국의 역사를 배울 때 전쟁 기록과 정치의 흐름을 배운다. 해당 영향이 많은 사람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중요도를 가졌고 각 사건이 왜 비중이 있는지 결정짓는 건 역사가의 몫으로 돌아간다. 취사선택의 기준과 더불어 모여진 조각 기억들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정하는 일이다. 교훈의 내용을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가 낳은 가르침은 현재에 대한 메시지를 도출한다. 지금 살고 있는 모두가 똑같이 겪는 삶의 여정에서 한 번쯤은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든다.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 이야기는 '로마'라는 영화 제작을 통해 하나의 역사 이야기를 창조했다. 1970년대 겪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2018년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만난 매일의 일상을 개인과 사회와 세계사적 경험과 연결 짓는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개인적인 기억이 가냘픈 일기장처럼 보이지 않도록 장기를 발휘한다. 역사적 경험으로 승화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를 도입한다. 먼저 제목 '로마'는 실제 멕시코에 있는 '멕시코 시티'의 부유한 동네다. 감독은 그곳에서 자랐다. 한 도시에 스며든 현대적 장면들과 인물들의 풍습을 주인공 격에 해당하는 제목으로 삼았다. 영화 속 분량이 가장 많은 '클레오'는 영화에서 백인 가정의 원주민 가정부 직업을 연기한다. 동시에 감독 본인을 자식처럼 키운 가정부인 '리보'라는 실존인물을 역사적 주인공을 표현한다. 한 번도 멕시코에 가본 적 없고 1970년대에 살아보지 않은 관객도 '클레오'와 주변 환경을 몰입하게 만드는 카메라 워크도 준비되어 있다. 흑백 필름으로 찬찬히 인물의 동선과 머무르는 공간을 처음 지켜보는 사람의 시선처럼 훑고 있다. 영화적으로 개입되지 않아도 괜찮은 개가 짖는 소리, 집 바깥에서 들리는 도로의 소음,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리얼함을 연출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실제 있었던 실화를 지켜보는 것 같은 연출적 세팅이 맞이하는 건 억지로 극화되지 않은 '클레오'의 이야기다. '클레오'는 늘 그녀가 머무르는 공간과 시간을 대변하는 듯 주도적으로 화제를 만들거나 꾸미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을 맞이하는 평범한 태도가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서 식모 일을 한다. 그 집에서 중학생 이하의 4명의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와중에 친자식이 아님에도 엄마의 마음으로 다가간다. 연애 감정을 가진 젊은 남성을 만나지만 그는 임신을 시키고 도망간다. 가족 없이 홀로 지내온 까닭에 그 사실을 고용주인 집안의 부인에게 이야기하고 의지한다. 고용주 가족은 따뜻하게 '클레오'를 신경 쓰며 태어날 아기와 그녀를 돌본다. 마침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시위가 일어나 '클레오'가 휘말린다. 하필 그때 양수가 터지고 병원에 실려간다. 아이는 안타깝게도 죽은 체로 세상에 나온다. 고용주 집안의 남편도 집을 버리고 바람을 피워 떠난 탓에 부인과 4명의 자식들과 친분이 두터운 '클레오'는 다 같이 해변가로 휴가를 떠난다. '클레오'는 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아이 중 한 명을 목숨을 걸고 구한다. 다시 '로마'에서 일상이 이어진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여러 의도를 살필 수 있다. 첫 번째로 그가 삼은 이야기의 소재다. '로마'에서 자신이 커 나가면서 바라본 1970년대의 멕시코가 아니다. '로마'에서 자란 자신이 큰 상태에서 재구성한 식모의 한 단편을 내세운다. 단순히 가난하거나 소외된 원주민 계층을 골랐다는 것이 이야기의 질을 높일 수는 없다. 핵심은 해당 계층에 속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어떻게 겪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비주류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환경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선을 얻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친밀한 관계임과 동시에 집안의 가정사를 밀접하게 맞닿아 함께 겪고 성장한다. 고용주 남편의 바람, 남자 형제들 간의 물리적 다툼, 고용주 부인의 정신적 괴로움은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외부의 인물 곁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은 미묘하게 경제적 주류의 껍질과 표면을 벗겨내어 사회적 지위가 갖고 있는 맨 얼굴을 드러낸다.
두 번째는 민낯을 비추기 쉬운 소재를 앞뒤 맥락에 사용한 방식이다. '클레오'가 내린 감정적 선택의 결과는 영화 후반부에 가서 새로운 관계 구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일이 일어나는 대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미래를 향해 조금씩 주변과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꾸고 있는 모습이다. 주도적이거나 쟁취적인 태도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가진 심적인 파도는 밀리고 쓸려와 경제적 울타리를 부수고 지운다. 고용주 집안의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클레오'의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사랑은 분명 능동적 행동이다. 관점에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고 남보다 앞서가는 빠르고 좋은 차를 구비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과 순간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 능동적이라고 서술할 수 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것들을 수동적인 것이라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을 낳고 구하고 기르는 온전한 마음 역시 역사 중심에 있는 중대한 사건과 결정의 일부임은 틀림없다.
세 번째는 성장하는 서사를 포함시키지 않은 결단이다. '클레오'가 영화적 인물로서 감정과 생각의 변화로 스스로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영화적 기회는 여러 번 제공된다. 임신 사실을 고용주 집안에게 전달했을 때, 임신을 시키고 도망간 아이의 아빠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그리고 수영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물에 빠진 고용주 집 아이를 구했을 때, 영화적 인물이라면 보통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말과 행동으로 감정이 사건의 연속을 만들도록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하지만 '클레오'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그 어떤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자기의 몫으로 감당할 뿐이다. 한 뼘 성장할 수 있을 만한 순간에도 반응하지 않은 인물의 행적은 화자의 주장을 전달하는 그릇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읽히는 효과를 자아낸다.
알폰소 쿠아론이 목표한 바는 고스란히 '클레오'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클레오'는 주관적 해석을 최소화시킨 서술 형태로 다가온다. 많은 소동을 겪고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려는 정치적 수를 쓰지도 않고 인물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영화 오프닝에서 주차할 수 있는 마당 바닥을 물청소 걸레질로 시작하여 빨래 거리를 들고 널기 위해 옥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끝난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슬픈 현실이 펼쳐질 때도 꿋꿋하게 이겨내거나 극복하기보다는 담담하게 그 파도를 맞이할 뿐이다. 카메라는 감정 극대화를 위해 클로즈업을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생에 닥친 파도를 거스르는 현장은 사랑으로 품은 고용주의 아이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다. 역사와 생의 물결에 대항하지 않는 것은 순응이나 포기가 아니라 감내함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의 증언은 자신을 키워 준 '리보'라는 식모를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고마움이나 애틋함보다 그가 치중한 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남편의 바람, 도망간 아이의 아빠, 혼자 남은 여자들은 시의적이다. 상처를 가진 여자들은 불쌍하거나 고달프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끼리의 연합이 무조건적으로 희망적이지도 않다.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한 인물들은 아이들을 책임지고 기를 뿐이다. 그것이 전부임과 다름없다는 것이 영화와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다. 낳고 기르는 것이 제한되거나 거세된 역사와 따뜻함과 공존을 기억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대입할 수 있다. 알폰소 쿠아론은 언뜻 당연해 보이는 낳고 기르는 작업을 미래가 좌지우지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진실로 삼는다. 지금도 매일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