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의 기록을 엮은 <배트맨 앤솔로지>로 현대의 전설과 민담 사유하기
바야흐로 히어로와 아이돌과 캐릭터의 전성시대다. 미디어와 산업이 발전하기 전 종교나 국가지도자가 가지고 있던 인물 신성화에 대한 전략은 문화시장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특정 조건을 갖추고 운이 따르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무한한 애정과 사랑을 누리게 된다. 20세기에 종이 잡지 매체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미국의 히어로 캐릭터들은 21세기 들어서 영상과 만나 현실적 인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몇십 년 간 축적한 이야기와 전통을 원료로 삼아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여 스펙터클을 쏘아대고 있다. 그들에게 오래된 히어로는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동시대 인물로서 함께 성장하는 친구이자 이웃이 된다. 이야기가 전승되는 과정은 마치 전설과 민담이 말과 글로 전해지던 옛 고전들을 닮아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들려지고 말해지는 이야기는 그 세계의 거울이자 삶의 지침서가 되기도 한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그중에서도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현대 도시의 그림자다.
배트맨은 1939년에 처음 창조되어 발행된 잡지 속에 등장한 캐릭터지만 여전히 만화와 영화 시장에서 흥행 적중 카드로 쓰이고 있다.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그 안에 내재되어있다. 이 캐릭터는 현대 도시가 만든 사회 속에서 파생되는 신화와 전설과 민담의 경계선 사이를 오가는 유일무이한 성격을 갖추고 있다. '빌 핑거'라는 작가가 배트맨의 기원과 주요 스토리를 만들기는 했으나 그 뒤로 수십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수백 개의 호수로 배트맨의 이야기는 계승되었다. 또 중간중간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인해 영향을 받기도 하고 판매 성적과 인기에 따라 컨셉과 장르가 바뀌기도 했다. 다른 유명한 히어로들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변천을 겪어왔지만,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장점은 '고담'이라는 도시를 주인공과 동일시할 수 있는 배경이 있다는 점이다. '고담'이라는 도시는 배트맨이 활동하는 도시이며 '뉴욕'과 매우 닮아있어 그 상황과 분위기를 비유할 수 있는 무대적 장치로 쓰인다.
'뉴욕'은 20세기에 들어서 세계 경제와 문화의 수도로 통하기에 각국의 주요 도시들은 '뉴욕'을 조금씩 닮아있다. 현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뉴욕은 점차 경제를 문화로 삼은 거대한 그릇이 되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의 대표성을 획득하게 된다. 뉴욕의 현실적 일상과 반복은 곧 현재의 언어와 사람들의 행태를 상징하게 된다. 이를 구술된 이야기로 엮으면 그것은 역사적 서술 방식과 유사해진다. 뉴욕의 경제적, 문화적 힘이 센 만큼 배트맨의 인기와 관심은 늘 동일하게 유지될 원동력을 갖는다. 그중에서 배트맨은 신화가 되기보다 전설적 인물이 될 운명을 지닌 나약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1930년대에 배트맨의 등장 이전 슈퍼맨은 이미 공적이고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무결한 영웅으로 세계를 지키고 있었다. 슈퍼맨은 신화의 특징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주인공은 신성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상의 나로서 모범이 된다. 한계를 넘어서 공동체의 인물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이 가지고 있는 긍정을 최대화한다. 특히 미국이라는 국가를 상징하면서 집단을 하나로 결집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큰 묶음은 또 하나의 차별과 폭력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점이 늘 역사 속에 벌어져 왔다. 그 대안이 신화가 아닌 전설적인 인물들이었다. 신화는 믿음으로서 지켜져야 하고 이야기의 진실됨이 가치이자 모든 것이었다. 이에 비해 전설은 전해진 사연을 토론하면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의심하고 진실이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이러한 과정은 사실을 따지기보다 상상력에 의지해 지금 삶의 모습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배트맨은 자연스럽게 시대에 맞게 내용이 바뀔 수 있는 전설적 인물에 속한다.
초창기 배트맨의 시작은 '빌 핑거'라는 스토리 작가와 함께했다. 그는 셜록홈스의 탐정적인 면모와 당시 유행하던 영화들에서 참고한 무법자적인 이미지를 결합해 범죄에 맞서는 영웅을 만들었다. 지금도 배트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회색과 푸른 망토, 조커와 같이 교활한 악당, 어린 시절 범죄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부모를 목격한 트라우마 등이 있다. 주요 캐릭터들은 물론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범죄에 대한 복수심, 초능력이 없는 대신 지적이고 육체적인 훈련을 통해 세상과 맞서려는 태도도 모두 초기 1년 사이에 모두 정립된 설정이었다. 이후에는 만화시장의 부흥과 성장, 영화나 TV시리즈의 흥행 여파, 창의적인 작가진의 지속적인 투입과 변화 시도가 전투적인 탐정 이야기의 생동감을 이끌었다.
1930년대는 신문 만화 연재의 전성기였다. 일간지와 일요신문에 실리는 만화들은 큰 인기를 얻는 종목이었다. 이에 힘입어 배트맨은 초기부터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40년대에는 당시 세계적인 국가 간 갈등의 분위기를 담아 변칙적 스토리가 시도된다. 배트맨과 그의 파트너 로빈은 도시를 벗어나 우주를 모험하는 요원이 된다. 십 년 정도를 주기로 시대의 안정과 긴장을 반복하면서 늘 다시 범죄와 함께 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회귀하곤 했다. 1970년대는 가벼웠던 공상과학물의 성격을 완전히 벗고 심각하고 어두운 심리 드라마의 성격이 강해졌다. 도시에서 포식자로 군림하는 지도층의 부패함, 그들이 악독할수록 깊어지는 배트맨 내면의 고독함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이야기적 예술 지향은 새로운 독자층과 작가진의 요구였다. 단순한 범죄와 탐정에 회의감을 가졌던 영국계 만화가들은 배트맨을 사회적 실험실로 만들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조커나 배트맨과 같은 분장을 하지 않더라도 정신적 고통, 노예적 삶, 사악함에 대한 가치판단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배트맨의 성격은 어떠한 작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졌다. 어떨 때는 여러 파트너들과 힘을 합쳐서 적을 물리치는 팀워크를 발휘하다가도 독선적으로 변해 집단이 아니라 홀로 적을 상대하는 외로운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드라마는 1980년대에 장르적 심화를 구축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독백적 질문, 가면과 자아를 분리해서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 무기력하고 심약한 자신을 대하는 태도 등은 독자들이 원한 결과였다. 팬들은 직접 투표를 통해 그에게 가장 가까웠던 파트너가 조커와의 전쟁에서 죽는다는 설정을 넣는 것을 찬성했다. 조커는 그 비극의 대리인일 뿐이었다. 폭력과 퇴폐적인 도시, 높은 연령층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는 새로운 독자층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어른이 되어가는 현대인의 딜레마와 고민을 녹였다.
배트맨은 슈퍼맨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롭고 비장하다. 절대적인 믿음을 주기보다는 관찰과 주시를 통해 견제하는 쪽에 가깝다.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로 살고 있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부모의 죽음과 범죄와의 전쟁은 늘 그 자신을 작고 나약하게 만든다. 이러한 서사가 환기시키는 건 성찰과 회환이다. 전설적 인물들은 배트맨처럼 시대와 맞닿은 인물들이다. 세상에 도사리는 위험에 고뇌하고 선택에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의 고민은 곧 실제 역사적 범죄사건들과 겹쳐지면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서 그의 아성에 균열을 만드는 민담이 극적인 인기를 만드는 현상이 생겼다. 바로 조커와 같은 악역들의 성공이다. 민담은 신화와 전설처럼 객관적 진실이나 주관적 사실을 따를 필요가 없는 허구로 가득한 상상의 이야기로 분류된다. 실제와 가까운지, 리얼한 캐릭터인지와 관계없이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서술이다. 남다른 능력으로 삶의 성공과 행복을 예찬하는 캐릭터는 최근 동향을 눈에 선하게 비친다.
민담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 길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도 저지르고, 자신을 막는 대상을 넘어야 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 그 존재는 세상을 수호하려고 애쓰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될 수도 있다. 전통적인 민담의 주인공들은 크고 무서운 상대를 속임수로 인해 무너뜨리는 쾌감을 선사했다. 공동체의 가치나 진실보다는 자기 신뢰와 긍정으로 여유와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요즘 시대의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가치들과 매우 맞닿아 있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은 기존 세상의 윤리와 의무와 법칙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 욕망의 극단을 달리는 인물들은 때로 조커와 같은 악당이 되기도 한다. 그가 얼마나 나쁜지와 상관없이 폭발적인 성공을 이뤄내는 인물들이 지지를 받는 이유는 현실에서도 겪는 비참함을 허구의 이야기에서만큼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배트맨은 분명히 1980년대를 정점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실체이자 현대 도시 문화의 전설적 영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민담의 주인공들이 존중받고 박수받는 시대로 도착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무력하게 방황하며 비극적인 고통을 겪는 배트맨의 모습은 이제 현실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 되었다. 시원하게 모순을 무시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멋진 개인들의 이미지의 노출이 훨씬 더 자주 벌어지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20세기 동안 신화 속 인물과 닮았던 절대적 믿음을 기반으로 한 슈퍼맨의 인기가 한물가고 현실을 고민하는 전설적 영웅인 배트맨의 전성기가 도래했었다. 21세기에 배트맨의 아우라는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이제는 개인의 능력을 통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민담의 주인공들이 영웅을 위협하고 있다. 향후에 지속될 배트맨 시리즈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할 것인지, 과거에 머무를 것인지, 흥미로운 관찰을 끌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