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으로 폭력을 이기는 방법

간디, 마틴루터 킹, 오트포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라는 비폭력 운동

by Rootin

인간은 누군가를 해하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의 대중이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 조직된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다. 만약 부당하고 정당하지 않은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면 그에 반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법적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의식도 타협과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 그 과정은 길고 거대한 노력을 동반한다. 물리적인 힘을 가진 무장 세력과 대치해야 할 때는 노력을 넘어 피할 수 없는 희생도 요구된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많은 역사는 그 희생을 치르며 소중한 가치들을 새롭게 지키고 만들어왔다. 긴 시간 동안 싸우고 죽으며 펼쳐왔던 운동에 비폭력을 통한 움직임이라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이름으로 짐작되는 비폭력 운동의 전개는 많은 오해를 품고 있는 편이다.


역사가들이나 언론은 인류의 역사에서 비폭력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때가 잘 맞아 우연한 계기로 퍼져나간 감정적 소용돌이와 같은 평가들이 그 예이다. 통제할 수 없이 번져버린 우발적인 사건들이 촉발시키는 것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위대하고 우수한 지도자 한 사람의 역량이 모든 성과의 주인공으로 삼는 이야기 짓기도 빈번하다. 모든 운동이 끝났을 때의 결과는 법안 통과를 통해 명백하게 정리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을 축소시키는 경향도 있다. 순간의 절정에 다른 대규모 움직임이 끝나고 나면 체감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피하지 못한다. 감정적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잠잠한 물결만 남으면 실패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왜 동원하지 않는지에 대한 논쟁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비폭력 운동이다.


비폭력 운동을 대하는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또는 일이 진행 중일 때와 결과로써 모든 것이 끝난 후의 분위기의 차이가 다른 시점에 글을 쓰면서 생긴 관점도 있다. 직접 변화와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실제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이다. 무엇이 폭력인지, 비폭력인지, 결실을 맺었는지, 불편함이 해결되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노예, 여성의 정치 참여, 어린이의 노동,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해지지 않은 것은 법안 통과의 영향도 있지만 대중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도 사람의 인식도 특정 지도자 한 사람이나 공신력 있는 언론사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정적인 키는 항상 대중이 쥐고 있다.


20세기 이후로 대중과 함께 일어난 수많은 비폭력 운동의 힌트를 준 사람은 간디다.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78명의 추종자와 함께 해안가를 향해 200마일, 약 320킬로미터를 걸어서 행진했다. 4월 5일까지 약 1달간 걸음을 이어 도착한 곳에서 군중에 둘러싸인 간디는 그들을 지나 개펄에서 소금 한 줌을 쥐었다. 당시 간디의 조국 인도는 영국 식민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소금은 정부를 통해서 만 사고팔 수 있는 것이었다. 개인이 혼자서 소금을 채취하는 것도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간디는 당당히 제국주의가 하는 생각과 법에 반대함을 비폭력으로 드러냈다. 이후 알려진 대로 저항운동은 범위가 넓어지고 불복종 운동은 규모가 커졌고 결과적으로 6만 명이 넘는 인도인이 체포되었다. 그들의 운동은 실질적으로 법을 바꾸는 협상으로 직행하진 않았지만 커다란 상징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간디의 운동에 담겨 있는 존엄성에 대한 확장은 수단적 차원보다 상징적 차원에 가까웠다. 여론의 세력을 모아 커나가는 조직 활동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에 비유할 수 있다. 잘 기획된 운동은 무대에 올린 이야기와 같다. 극장에서 공감한 관객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소금을 주제로 한 하나의 사회극은 문제를 중대한 현안으로 전환시키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단기적 성과는 보지 못하더라도 현안에 대해 여론을 만드는 기능을 해낸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전반적으로 '대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에는 더 많은 자원과 회원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고 계획을 실현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간디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마틴 루터 킹이었다.


이른바 '버밍엄 모델'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 C는 1963년 4월 3일에 시작했다. C는 대결을 뜻하는 Confrontation의 약자다. 버밍엄 지역은 주기적으로 인권 운동자의 집과 사무실에 폭탄이 들어오는 험한 격전지였다. 마틴 루터 킹은 지지자들의 결의나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비폭력 운동을 준비하지 않았다. 몇 달에 걸친 세부 실행 계획을 준비하여 여론을 형성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시위의 이동 동선과 1차, 2차, 3차 표적이 될 건물들에 이르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점검했다. 법원 명령 위반 시 치를 대가와 법적 조치도 사전에 준비했다. 또 시에 지불할 보석 금액과 체포된 활동가들의 구금 기간까지 미리 계산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사례 하나가 있더라도 젊은 34살의 지도자가 벌이는 계획에는 의심이 충만했다.


마틴 루터 킹 그 자신도 처음에는 평화주의를 실현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56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총기 소지 허가를 신청하고 무장경비원들을 늘 배치하길 원했다. 1959년 인도 방문 이후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듯하다. 간디의 기금 행사차 인도로 순례를 다녀온 킹은 개인적인 신념을 넘어 비폭력이라는 방법에 희망을 가졌다. 1962년 한 집회에서 연설하는 도중 건장한 백인 남성 미국 나치당원이 킹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때부터도 킹은 폭력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비폭력이라는 큰 주제로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조직의 단합되지 않은 모습에 실망한 지지자들은 걱정이 많았다. 이때 돌파구로 삼은 것은 최고지도자였던 킹이 스스로 감옥에 수감되는 것이었다. 체포되는 사진이 언론에 노출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세를 힘입어 정치적 힘으로서 비폭력을 드러내고 현실에서 승리한 킹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킹의 비폭력 시위는 대규모 시위가 끝난 후에도 기반이 되는 조직적 하부구조가 버틴 덕분에 셀마로 이동하여 지속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킹의 비폭력 운동보다는 조금 더 유쾌한 감정의 오트포르를 만날 수 있다. 오트포르는 1998년부터 세르비아 독재자에 맞선 젊은 층의 운동이었다. 주로 재미있고 유머 가득한 실천들이 주목을 받았던 비폭력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성공적이었다고 기억되는 큰 이유 중에 하나 역시 조직의 구조가 튼튼했다는 사실이다. 강력한 지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형태보다는 여러 계파들이 모여서 만든 이질적인 특성들이 나타나는 곳이었다. 애초부터 무기를 들었다가는 밀로세비치라는 독재자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기에 비폭력은 전제되어 있었다.


Otpor 오트포르 로고


그들은 자체적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주먹 모양을 양식화한 로고를 중심으로 담장에 스티커를 붙이고 티셔츠를 판매했다. 이렇게 언론을 등에 업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수많은 작은 행동을 늘려나갔다. 오트포르 참가자들은 시위가 끝난 이후 행정부에 입성하겠다는 욕심이 적었기에 다양한 이념을 가진 배경의 동료를 포용할 수 있었던 걸로 여겨진다. 이들의 유머러스한 움직임에 관심을 보인 구경꾼들이 생기면 곧바로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새로운 지지자들은 신속에 조직에 가담하고 기존 참가자들은 조직에 헌신적으로 녹아들었다. 서로 교육을 하면서 활동가들의 능력은 끊임없이 향상할 수 있었다. 10시간 교육과정과 자율적 운동 권장은 오트포르 정신을 자연스럽게 여론으로 만들었다.


오트포르가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운동이었다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언론의 관심을 한 번에 끌었던 운동이었다. 2008년 미국의 경제위기는 역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업률은 두 자릿수에 육박하고 노동자들은 주택을 압류당했다. 불만이 가득했던 이들은 모여 17만 5,000명이라는 숫자로 표현되어 워싱턴 DC에 집결했다. 이들은 운동에 필요한 자원, 회원, 조직력, 정책요구, 연합체를 준비했지만 언론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뉴욕 맨해튼 남부의 주코티 공원에서 야영을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은 화제를 바꾸는 결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행동과 참여의 수위가 급상승했다. 활동가들은 금융 중심가 앞에서 투자은행 입구를 가로막고 텐트를 설치했다.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업무를 방해했다. 누군가의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건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결국 대의에 대한 정당성을 얻어냈다. 소득 불평등에 대한 관점을 바꾼 순간이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오트포르, 마틴 루터 킹의 버밍엄 모델, 간디의 소금 행진은 비폭력운동이었다. 각 운동별로 공통점은 있더라도 여론의 지지를 얻어냈던 방식과 계기는 모두 달랐다. 결국 그들은 비폭력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넘어서 승리를 위해 필수적으로 택해야 했던 전략이었음을 증명했다. 기업이나 정치 권력자들은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으로 광고나 각종 지면을 활용한 캠페인에 수천 달러를 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케팅이나 홍보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대중들의 마음을 바꾸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성과를 만들어내는 비폭력 운동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의 소임을 강화하고 감당해야 하는 위험을 받아들일 때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전략적인 희생은 큰 변화를 창출한다. 한 명의 뛰어난 지도자 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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