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네이션>의 피로한 도파민 현상을 <미디어의 이해>로 분석하기
중독 위험성이 있는 스마트폰, SNS는 필요악일까? 적절하게 관리해가며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한 번씩 화면을 괜히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다. 디지털 기술은 손쉽게 쾌락을 만든다는 관련성 때문에 도파민을 주제로 한 뇌과학적 연구가 개입하곤 한다. 약물을 위주로 다뤄왔던 중독성과 뇌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 디지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뇌가 가지고 있는 성분과 뇌에서 활성화되는 방식들을 분석함으로써 결과를 내놓고 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 뇌과학자 '애나 렘키'는 <도파민 네이션>이라는 책을 통해 디지털 중독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겨냥한 대상은 일이나 업무에서 디지털 활용 환경과 관련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거나 삶의 위기로부터 중독에 빠진 이들이 아니라 충분히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문제가 있는 부류다.
소득을 많이 받고 있으나 더 많은 보상을 부르는 구조에서 일을 하다 보니 삶에서 균형이 무너진 사례들이 차례로 나온다. 망가진 저울을 원상복구 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게 만들어주는 쾌락이다. 결국 이 책을 읽었을 때 일어나는 바람직한 변화는 고통을 쾌락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고 솔직한 심정을 노출시키며 지내는 일상이다. 풍요로운 나날 중에서 더 많은 자극을 쫓는 것을 멀리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균형 잡힌 태도를 선택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책에서 주문한 대로 따라 하다 보면 정말로 쾌락을 잘 관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저자도 궁금해하고 독자도 호기심이 느껴질 만한 질문은 왜 부유한 국가에서 결핍을 느끼는 심리를 느끼는가이다.
저자는 뇌과학자의 관점에서 도파민 과부하에서 원인을 찾는다.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이 부추기는 도파민의 극대화는 결핍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쾌락 자극에 반복해서 동일하게 노출되면 처음 느꼈던 황홀하고 즐거웠던 기억은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고통은 점점 더 강해지고 길어진다. 다시 고통을 잊어내기 위해 보상을 찾으려는 마음은 더욱더 자극적인 요소를 찾게 된다. 아무리 자극이 강하더라도 오랫동안 노출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은 감소하고 쾌락 경험의 기준점은 계속 높아져서 조절이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부유한 국가, 풍족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왜 똑같은 환경을 바꾸지 않고 일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문제의 원인을 과학적 사실과 본인의 문화적 견해를 통해 주시한 인물이 '마셜 맥루언'이라는 미디어 이론가이다. 그가 내놓은 미디어 이론이 발표된 년도가 1964년이라는 점은 다소 신뢰를 얻기 어려워 보이는 시점이다. 그 시절에는 컴퓨터 대중화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금 가장 화두가 되는 디지털 환경도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기'라는 핵심 기술을 통해 50년 뒤의 현재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해버린 사례로 남았다. 뇌과학, 도파민에 관한 연구, SNS 매체에 대한 지식은 없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라디오가 바꾼 문자 환경과 같은 굵직한 재료들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가 추론한 사실관계는 2022년의 뇌과학 근거 만으로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점이 들어 있다. 이 진실은 인간이 왜 기술이 발전하는 동안 멈추지 않고 결핍의 마음을 원하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다.
맥루언은 사람들이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가지고 한 일'이 기계의 의미나 메시지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1960년대나 2020년대나 기술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각종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점을 위주로 다루는 것에는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관련한 예시로 드는 것은 '프랑스혁명'이다.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제시한 프랑스 역사가 '토크빌'의 견해에 기대어 이야기한다.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돌려서 읽었는지는, 그 내용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른 역사가들이 수두룩하게 설명하고 있다. 토크빌은 18세기에 '인쇄된 언어'라는 것의 힘이 과소평가되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문자가 아닌 음성 언어 시대는 종말 되고, 연속성과 동일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민족'으로 뭉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맥루언은 프랑스혁명 당시 인쇄된 종이에 적힌 내용은 잠시 잊고 인쇄술이라는 기술 자체를 보면 미디어가 가지는 의미를 비로소 조금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운을 띄운다. 하지만 인류는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탄생할 때마다 미디어의 충격을 여러 가지 이유로 무비판적이고 순종적으로 수용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결과 인간은 더욱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방향을 스스로 잃고 말았다. 전기 기술이 활발히 발전하는 시대를 지켜본 맥루언은 사람들이 새로운 상황을 새롭다고 인식하지 않고 '낡은 상황'이라고 느낀다고 보았다. 새로운 기술이 생겨날 때 혼란을 겪게 되는데 각 분야 별로 무엇인가 지체되는 현상들이 나타남에 주목했다. 어쩌면 이와 같은 판단에는 지금 과학적으로 밝혀진 도파민과 중독 문제의 연관성이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기 기술의 핵심 특징들은 SNS나 온라인 플랫폼 기술들과 맞닿아 있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전환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혁신들은 전력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전력기술의 환경은 중앙을 해체하고 여러 개의 중심을 이곳저곳에 심거나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시대는 그 속도와 규모가 점점 더 향상되어 결국 너도 나도 모두가 중앙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자신이 기계를 통해 또는 기계로 확장되었다는 비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단순히 쾌락을 좇는 중독자의 모습이 아니라 의식을 기계에 맡겨 놓는 행위인 것이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언이 가져온 이야기는 나르시스 신화다. 나르시스는 실제 사랑에 집중하지 않고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물 안에 비친 나에게 다가가다 빠져 죽는 결말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확장할 때에 자신의 확장된 이미지나 반복된 이미지를 스스로 제어하기 전까지 나르시스처럼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비유한다. 다양한 종류의 자극이 지속적으로 들어오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게 된다. 미디어의 발전은 언제나 교환의 가속화를 가져온다. 부담과 스트레스는 더욱 늘어나고 자신의 신체 중 일부를 단절시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된다.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선택한 단절은 위협적인 순간에서의 탈출을 뜻한다. 앞서 언급했던 중앙의 붕괴로 인한 각각의 중심화는 흔히 떠올리는 중앙 정부나 중앙 부처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도 중앙에서 의사결정에 핵심이 되는 판별 기능을 몸 바깥인 외부에 꺼내놓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디어에 중독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 안에 기계의 일부를 옮겨서 안으로 들이고 기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몸 안에 있던 중요한 의사결정 능력을 기계에게 내어준 상태인 셈이다. 주도권을 내주었음에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부끄러운 감정이 생기진 않는 이유는 기계 세계가 인간의 소망과 욕구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를 더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나르시스가 빠졌던 감정인 사랑이다. 기계가 안겨주는 풍족의 순간들은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르시스 신화의 구조가 강력하게 들어맞는 만큼 욕망의 관점이 아닌 윤리적 가치관의 변화 역시 전기 기술에 의해 빠르게 각광받는다. 전기 시대에는 지속적이고 단일한 삶보다는 순간적이고 전체적인 느낌과 시야가 요구된다. 기존 촌락 형태에서 맺어졌던 관계들은 다양하고 다원화된 구조로 복잡해진다. 눈으로 만 보고 인식하는 시야가 아니라 온 지구를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인식이 시작된 것이다.
윤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복잡해진 구조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기계에까지 몸과 마음을 내어준 인간은 길을 잃는다. 단순히 도파민을 관리하는 것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기계와 미디어 자체에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행위는 통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일을 벌일 수는 있으나 미디어에게 관심을 쏟는다고 해서 무엇이 해결될 수 있을 만한 요소가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디어는 기술에 주목하게끔 만들어 효과를 믿고 따르라는 메시지를 줄 수는 있다. 이에 순종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에 이용 가능한 감각들을 사용하려는 욕구와 같다. 단순히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신체 일부를 나의 의지대로 쓰고자 하는 행동과 같다는 해석이다.
불행한 사실은 어떤 미디어든 쓰면 쓸수록 눈과 귀와 신경들을 통해서 저절로 이득을 보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법적으로도, 경찰의 제재로도 손도 쓰지 못하고 모두 넘겨주는 셈이 된다. 이러한 행태는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바친다는 점에서 노예가 가지는 속성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자발적이고 심지어 적극적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기술 자체가 만드는 수요의 창출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스마트폰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 현재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장의 소비자들이 스마트폰을 만들면 돈을 지불하겠다고 해서 요구가 채택되고 제조되어 출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꾸로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니까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이 필요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매 욕구에는 죄책감이나 거부감과 같은 감정은 없고 오로지 신체의 일부를 쓰려고 하는 듯한 감각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맥루언이 내놓는 근본적인 대응 방안은 새로운 기계 기술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미디어의 내용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닌 그 자체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SNS에 교육적이고 교양이 가득한 콘텐츠를 만들어서 배포한다고 해서 SNS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전기 기술 시대까지도 살아남아 있는 문자 및 시각 세계에 간직되고 있는 지혜와 성찰들을 새로운 기술과 비슷한 깊이와 구조로 다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에도 당시에 미디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은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종이에 스는 것을 우매한 행위로 여겼던 스콜라 철학자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판단이다. 만약 그들이 구사하던 음성 언어들과 머릿속에 저장한 경험과 지식을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구조로 제시했다면 조금은 더 오래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인쇄술에 의해 존재감이 사라진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세상의 중심이 인간인 것처럼 인식하지만 정작 몸과 신체는 기계에 맡겨 놓고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는 데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기술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개발하고 연결 지어 닮아가고 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기는커녕 풍족함과 부유함을 되돌려 받는다. 만약 이 순간에 결핍이 느껴지고 그 이유가 궁금하여 '마셜 맥루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만나게 된다. 단순히 문자시대의 책을 전부 온라인 플랫폼이나 SNS에 콘텐츠로 만들어 공유하는 것은 내용을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에는 새로운 융합이 필요하다. 콘텐츠 교체하기를 넘어서 온라인 환경과 디지털 기술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적합하다. 기계가 한 일보다 기계 자체에 집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