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가 20세기 후반에 내놓은 답에 대한 관찰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다. 스스로 겪은 삶과 사물과 이치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말해볼 수는 있겠다. 각자의 삶이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는 누군가 명쾌하게 내놓은 답을 빌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1928년 생의 MIT 교수 노엄 촘스키는 꽤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해주는 '석학'으로 여겨진다.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1960년대에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으로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줄곧 미국과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때마다 등장하여 들어볼 만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왔다. 일반인들의 생각과 섞이고 흩어지고 뭉쳐졌다. 그가 연설회, 간담회, 세미나에서 내뱉었던 말들은 정답이 없는 사람다움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을 던져주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권력에 대한 속성이다.
보통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권력을 옹호하는 쪽과 권력을 비판하는 쪽으로 나뉘게 되어 있다. 어떤 곳에 서느냐에 따라 반대편은 악마화 되어 무조건적으로 나쁘고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권력을 나눠갖는 구조를 갖춘다. 생산, 규모, 소비, 투자, 일자리, 자원 등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은 정치와 법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도 권력이 맞다. 이들을 비판하거나 경제의 구조를 이론으로 설명하며 미래를 예측하려는 이들 역시 지식을 권력으로 사용하여 대중을 교육시키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할 역시 권력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쪽에 서 있건 권력자는 권력을 선뜻 내놓을 이유가 없다. 본인들의 결함을 언론을 통해 투명하게 밝히는 짓을 스스로 결심하지도 않는다. 권력을 파괴할 수 있는 비법 같은 것들을 교과서나 의무교육에 포함시킬 리도 없다.
권력은 권력을 유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강인하게 유지되는 구조속에서 권력이 지속하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외부에 모두의 권리를 위협하는 이가 존재한다면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책임자를 대신 내세우게 된다. 이는 권력의 이름과는 무관하게 권력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지도자나 정치지도자를 비판하기 위해 직함과 전문가스러운 이력을 가진 이가 지도자가 된다면, 이는 특정한 생각과 특별한 계층을 대변하는 스피커가 될 확률이 높다. 조금씩 관심이 사그라들 때는 인정을 받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와 화제로 다시 권력에 가까이 서게 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지도자가 다수를 대표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남과 타인의 미래 또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만들어주는 성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자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 수 있는 위인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제도와 인권에 대한 개정의 역사로 인해 지금 시점에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공인되어 있다. 각 개인은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판단을 보호할 수 있다. 이따금씩 필요한 만큼 개입 가능한 영역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해당 결과로 나타난 반응들에 대해 들어볼 수 있다. 그 이후에도 기회가 닿는 만큼 노력하기도 한다. 이 총제적인 과정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권력이 있건 없건, 누구나 원하는 행동을 고를 수는 있다. 원칙상으로는 다양한 선택지 내에서 골라볼 수 있으나 그 선택권이 제한되는 것 역시 권력의 속성과 연관이 있다. 권력은 스스로를 보호한다. 권력에 반하는 개인들의 경험은 권력에게 유익하지 않다. 경험과 선택을 제한할 수 있는, 눈을 돌리게 만드는 화제들은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지금 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통틀어봐도 늘 중요했던 일, 에너지, 개인들의 상호작용, 아이들의 미래는 중요도만큼 일상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넓고 많이 다양하게 관심을 끄는 것들은 혁신적이거나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들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연의 순리가 아니다. 무엇을 고르겠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모두 인간이 정하고 만들고 싶었던 대로 만들어 왔을 뿐이다. 인간이 늘 관심을 가지는 주제인 일, 에너지, 개인들의 상호작용,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말하고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역시 힘을 키워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는다. 하지만 정점에 서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오래 고민해보고 겪어본 주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 제도적으로 이러한 권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근의 일이다.
권력을 유지하거나 오르려고 하는 노력 외에도 다른 선택지는 권리에서 출발한다. 혼자서도 중요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관심사와 집중하는 분야가 다른 사람과도 만날 수 있다. 서로는 서로에게 배움을 줄 수 있다. 이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여러 복잡함 속에서 무엇에 더 관심을 가지고 무엇에 더 집중할 것인지 경험하게 된다. 권력이 보여주지 않아도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어떤 존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몰라도 상관없지 않은가 라는 단순한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그냥 쉽고 편하고 효율적으로 살 수도 있는데 굳이 피곤함을 감수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과 만나지 않아도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선하고 친절하며 예의 바르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여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희망에 있다.
희망을 가진 이들은 권력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있다. 권력자는 권력이라는 구조가 있는 한 늘 대체되고 언제든 유지되기 때문이다. 종교, 신념, 이데올로기를 따지지 않고도 외부 세계에 눈을 돌려 실천해볼 수 있는 선택지들이 오히려 희망이 바라보는 곳이 된다. 권력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생겨난다. 구조는 거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권력자들끼리도 각자의 보호막이 깨지는 일이 발생한다. 총과 칼로 벌어지는 폭력 외에도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 폭력이 늘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복잡한 박사학위 논문이 필요하지는 않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실질적인 문제들이 혼재되어 있다.
권력은 선과 악이 아니기에 권력이 있음과 없음으로 보는 것이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은 주인공처럼 기록되었다. 늘 존재했고, 권력 없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삭제하면서 교체되는 권력자들이 왔다가 갔다. 다만 권력이 가진 힘에서 '권리'라는 것을 조금씩 가져오는 전환의 순간들 역시 늘 존재했다. 권리는 권력보다 선하지 않고 권력은 권리보다 악하지 않다. 개인들은 기회와 의미의 측면에서 권리를 사용할 때 가치를 느낀다. 그렇기에 적어도 권력을 대하는 태도를 고를 수는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사람다움을 고르라고 한다면 권력의 속사정을 들어볼 만하다는 촘스키의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