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에는 태양이 떠올랐다.
오늘은 놀랍게도 아주 새로운 하루였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더라도, 극적인 사건이 없었더라도, 아주 특별한 일이 없었더라도 말이다.
가끔씩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저번 주와 같고,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번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에 연속이고 지루한 일들을 해야 하는 일과처럼 느껴진다면,
하늘에 떠올라 있는 태양을 한 번 쳐다보고 느껴지는 감정을 되돌아볼 수 있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본다면, 오늘 하루는 몇 년 전 내가 꿈꿔왔던 미래에 해당되는 날이다.
그때 꾸었던 그 꿈 그 모습 그대로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렸을 때, 척박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때, 꿈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갔던 때의 모습이다.
동시에 어떠한 꿈을 꾸고 있는 날이 될 수 도 있다.
이미 한 가지 꿈을 이룬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은 새로운 꿈을 또 새로 꾸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꿈을 기준으로 과거를 회상할지, 미래를 내다볼지는 자유지만, 둘 중 하나라도 잊었다면,
역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 시간 속에서 유영하는 나를 발견하게 해 줄 것이다.
모든 꿈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울이자 매개체가 되어준다.
한 가지의 꿈만을 바라볼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겪고 난 뒤의 느껴지는 감상은 의미로서 남게 된다.
누구나 화려한 일상, 완벽한 행복의 단편을 꿈꿀 수 있다고 믿지만,
그 삶을 들여다봤을 때는 언제나 이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다.
만남이 있고 이별이 있듯이, 오늘 태양이 떠올랐지만 밤이 되면 저물게 되어 있다.
영화 속 스크린의 무비스타는 언제나 태양이 하늘에 중천에 올라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하지만 스크린 바깥 속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상적인 하루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꿈꿔왔던 하루가 찾아오더라도 그 날의 태양이 지게 되면, 다시 끝나고 마는 하루가 되어 버린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하루 동안 오늘이 진짜 나의 꿈이자, 꿈으로 향해 있는 진짜 모습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될 수 있다.
영화 <라라 랜드>는 바로 그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러 실타래를 잘 엮은 구성물의 총집합 세트 같은 이 영화는 다양한 소재를 엮고 또 엮고 있다.
재즈, 사랑, 꿈, 뮤지컬, 춤, 노래, LA라는 지역, 할리우드, 연기, 미국의 영화산업과 뮤지컬 영화의 역사, 오디션, 전통과 현재, 계절의 변화, 낭만, 이상과 현실, 스크린과 창문 등과 같은 소재를 여기저기서 이은 이유는
별개로 놓아두려는 것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개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라라 랜드>를 끝까지 보고 나면, 남녀 주인공이 갑자기 시점을 서로 잃어버리고 과거인지, 꿈이었는지 진실을 알 수 없는 화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주체가 아닌 이야기의 객체가 되어 버린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끝까지 이을 수 있는 주도권을 의도적으로 잃게 만들었다.
스크린 속에 또 하나의 스크린을 만들면서 진짜 현실과 영화 속 진짜 이야기를 또 한 번 구분 짓기 위함이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이다.
영화 속 곡의 순서 구성은 모든 이야기의 경계에서 주제의 메시지를 기억하게 만드는 '길'이다.
시각적인 화면은 현실과 이상과 과거와 현재의 구성을 헷갈리게 만들지만,
청각적인 노래는 테마의 전달에 충실한 역할을 수행한다.
라라 랜드 OST 곡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7. Planetarium
10. Start A Fire
11. Engagement Party
12. Audition (The Fools Who Dream)
13. Epilogue
14. The End
15. City Of Stars (Humming) (Feat. Various Artists)
각각의 곡은 영화의 각 지점에서 캐릭터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려주는 좌표 같은 역할을 한다.
실제로 '미아'(엠마 스톤)은 "Where are We?"라는 질문을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에게 남긴다.
캐릭터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관객 역시 캐릭터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가게 될지 저마다 다르게 보고 만다.
그런데 곡의 내용과 반복되는 멜로디는 그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할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시작한 화면은
알록달록한 색의 옷을 맞춰 입은 배우들이 춤, 노래, 연주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떠난 이야기를 부른다.
이들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태양은 새로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반복한다.
여주인공 미아가 오디션에 실패한 날의 저녁을 다룬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원하는 배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카페 파트타임 일을 하며 지내는 중이다.
경력이 적은 배우 동료 들과 함께 우연한 만남을 통한 성공을 노래한다.
Someone이 나타날 것이고, 그 누군가로 인해서 내가 발견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Someone이라는 사람을 찾는데 실패한 여주인공은
우연히 발견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Someone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Someone 일지도 모르는 사람은 꿈을 위해 도전하고 있는 시기를 겪고 있는 같은 입장이었다.
남주인공은 재즈클럽을 오픈하기 위한 진지한 목표가 있지만, 현실은 비루하다.
세상과의 핏이 맞지 않고 있는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을 보여준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나'의 무대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 무대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봐야 하는 입장이다.
같은 공감대를 가진 이들은 LA 저녁노을, 등불 아래서 함께 감정을 표현한다.
남주인공은 자신이 설 무대를 찾고 있는 여주인공에게 오디션 합격을 응원하며
오디션이 답이 아니라면, 자신만의 무대를 스스로 개척하고 꾸며보라며 권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러 재즈클럽으로 데려간다.
그는 재즈에 대한 열정, 진심, 에너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재즈를 잘 모르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껏 여주인공에게 자신의 열정을 뽐낸 남주인공이지만,
내 꿈을 받아주지 않는 도시를 노래한다.
짝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순간이다.
이 도시는 다른 이들의 꿈은 모두 들어주지만 왠지 나의 꿈은 받아주지 않는 기분을 강하게 느낀다.
7. Planetarium
오디션에 계속해서 떨어지는 여주인공은 본인의 짝이 아닌 것 같은 사람과의 약속보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주인공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둘은 영화관에서 '이유 없는 방황'을 보다가 영화 속 명소인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한다.
천문대에서 느닷없이 가상의 세계로 넘어가서 판타지와 같은 화면을 통해 춤추는 장면이 묘사된다.
계절은 여름으로 바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남녀 주인공의 기분 좋은 순간들을 나열한다.
꿈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고 행복한 날을 맞이한 듯하다.
대신 서로의 꿈을 믿고 지지하며 응원해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인 건 남주인공이다.
흔들린 남주인공은 꿈이 아닌 도피처를 찾는다.
"우리가 찾는 건 '사랑'이야"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이 권했던 대로 자신만의 무대를 스스로 만들고 꾸며나간다.
반면, 남주인공은 꿈을 우회하기 시작한다.
남주인공이 꿈에서 멀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여주인공과도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10. Start A Fire
"오늘 밤 기분이 좋아."
남주인공은 자신이 원래 하고 싶어 했던 재즈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좋아하지 않는 전자음악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유혹에 빠진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11. Engagement Party
남주인공은 지인의 약혼 파티에서 피아노 연주를 친다.
꿈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달랐던 남녀 주인공은 갈등을 빚는다.
"This is not your dream."
성공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이 원했던 꿈을 이루는지의 중요함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 지점 때문에 만나기 시작했고,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여주인공은 스스로 준비한 무대에서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남주인공은 하고 싶지 않았던 음악을 무대에서 선보이고 성공을 얻었다.
여주인공은 하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이룰 수 없는 헛꿈을 꾸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결국 그 의지의 불씨를 다시 살려주는 건 남주인공이다.
12. Audition (The Fools Who Dream)
남주인공 덕분에 한 번 더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된 여주인공이다.
꿈꾸는 몽상가 바보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
여주인공에게 심사위원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어디에 있는지 실패한 뒤에도 왜 다시 도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시도한 도전이 어디로 이끌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색깔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우의 꿈을 심어준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꿈을 꾼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결국, 투어 공연을 떠나려고 했던 남주인공은 남아서 자신의 일을 다시 만들 준비를 한다.
떠나지 않고 남아서 꿈을 위해 도전했던 여주인공은 캐스팅되어서 파리로 떠난다.
13. Epilogue
결국 5년이 지나고, 5년 전 떠나고 남으면서 서로 원했던 꿈을 이루게 된 당사자들이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의 결말이 끝나는 듯했지만, 화면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남녀 주인공은 영화 / 뮤지컬 세트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 흐름과 전혀 다른 로맨스 스토리가 나열된다.
"결국 이 남녀 주인공 역시 꿈을 이룬 캐릭터들이지만, 스크린 속 인물입니다."
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14. The End
남녀 주인공은 5년 전, 5년이 지난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여주인공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직간접적인 질문을 남주인공에게 물었다.
시작과 끝을 모르고 도전한 두 사람이었다.
평범한 일상 중 하루였지만, 그와 동시에 5년 전 어느 날 꾸었던 꿈의 모습을 한 하루였다.
5년이라는 시간은 중간에 생략되어 있지만,
그 과정의 시작 앞에서 남녀 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분명하게 주고받은 무엇인가가 있었다.
처음 이들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같은 처지에서 꿈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어져야 했던 이유는
같은 처지에서 꿈에 대한 도전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꿈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장면들은 사실 그들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다.
꿈으로 향하는 접근 방법에서는 무수한 변수가 존재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꽉 막힌 고가 도로 위에서 한 번 마주치고 만나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어떤 선택으로 인해서 그다음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말까지 모두 본 관객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나는 관객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무대를 찾아서 무대를 꾸며야 하는 주인공이다.
지금 펼쳐질 무대의 결과는 무대에 올라서서 진행해야만 알 수 있는 현재다.
오늘 하루를 계획대로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인과적으로 연결 지어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면
오늘 아침에 태양이 떠올랐다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하루하루는 실타래처럼 연결되어서 꿈이 실현되는 중인 현재인 동시에
오늘 꾸는 꿈을 내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