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아이러니

<페일 블루 아이>

by CINEKOON

의문의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독을 즐기는 듯한 형사가 셜록 홈즈의 역할로 등장한다. 여기에 왓슨 박사 역할을 해줄 명석하되 연약한 시인이 그를 보좌, 그리고 아이린 애들러처럼 팜므파탈 역할로 배정된 의문의 여성 역시 모두 제자리에 선다. 장르적 정공법을 취하는 듯한 이런 초기 설정 때문에, <페일 블루 아이>는 일견 교과서적인 범죄 미스테리 및 추리 장르의 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인물들은 변모하고 진실은 전복된다. 다 끝나 평범하게 느껴졌던 사건이, 그 이면과 과거에 더 깊은 아이러니를 숨겨두고 있었던 상황. <페일 블루 아이>의 미스테리는 오히려 모든 게 다 해결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형사이자 응징자인 랜도르는 일견 축복받은 듯 했다.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이후엔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던 그 야만인 같은 세 명의 군인. 그들을 하나씩 잔인하게 도륙해야지-라는 계획을 세우고 그 첫 단추를 꿰었는데, 정말 운 좋게도 자신이 저지른 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로 스스로가 배정된 것. 여기에 끝까지 스스로를 숨길 수 있도록 근처에 있던 악마 숭배자들까지 랜도르 대신 대속 해준다. 그렇게 사건과 복수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진실의 분수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터진다. 랜도르가 절대 거짓말 하지 말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주제 넘게 조언했던 대상, 에드가가 그 모든 비밀들을 모두 알아차린 것이다.


예컨대, 장르는 갇혀있다. 살인은 일어나야하고 범죄는 그 댓가를 치러야하며, 탐정은 진범을 밝히고 진범은 악마로 남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장르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만 유효할 뿐, 장르의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변칙적인 태도를 취하는 작품들도 종종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장르는 실제 우리네 삶으로 스며들어 침범해온다. 우리네 인생이야말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분법적 시각이 무효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온갖 딜레마로 가득찬 세상. 유약한 희생양 쯤으로 그 최후를 맞이할 줄 알았던 시인은 끝내 모든 걸 밝히는 탐정이 되고, 인간의 도덕률을 뒤집은 줄로만 알았던 악마는 수호천사 마냥 의외의 도우미에 등극하며, 일생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랑은 한낱 제물이, 그리고 울분에 찬 단죄는 결국 범죄로 남아 공허한 바람이 되어 벼랑 끝을 맴돈다. <페일 블루 아이>는 사건의 끝 뒤에서야 수줍게 진실을 내놓음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스크린샷 2023-01-31 오후 6.59.35.png <페일 블루 아이> / 스콧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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