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밍 핫>
아프리카의 맹수 치타마저 언젠간 먹고 말겠다 신신당부한 제과업계의 전설, 치토스. 동종업계 비슷한 짬을 가진 프링글스나 도리토스가 그러하듯이, 치토스 역시 다채로운 맛으로 전세계 소비자들을 매혹시켜왔다. 그중에서도 '플레이밍 핫'이란 이름을 가진 치토스의 매운 맛 브랜드는 언제나 인기 품종. 그런데 그런 플레이밍 핫의 탄생 이면에는 웬 청소부의 공이 있었다고 한다. 대기업 산하의 핵심 과자 브랜드였으니 당연히 공부 좀 깨나 했다는 석박사들이 한데 모여 여러 화학적 실험들을 통해 만들어낸 맛인 줄 알았건만, 알고보니 플레이밍 핫은 당시 치토스 생산 공장에서 청소부로 일했던 리차드 몬타녜스가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시제품까지 만든 제품이었다는 것.
물론 현시점에서는 이런 이면의 이야기 또한 마케팅의 일부일 뿐이었다며, 드라마틱한 거짓 정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많아졌다 들었다. 다만 치토스는커녕 평소 과자를 잘 먹지도 않거니와, 어쩌다 먹었다 한들 본사인 미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떤 게 진실인지 아직 모르는데다 그 진위여부에 관해 실은 별 관심도 없으니... 이번엔 그냥 영화를 영화로써만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당연히 이 모든 게 실제 이야기였다면 영화를 다 본 나로서는 더 기쁠 것.
사실 영화는 굉장히 뻔하다. 같은 제과업계의 이야기는 아니였더라도 우리는 페이스북 창립자의 이야기를 다뤘던 <소셜 네트워크>나 애플의 절대자 이야기였던 <스티브 잡스>, 아니면 월트 디즈니와 메리 포핀스라는 콘텐츠의 시작을 엿볼 수 있었던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 같은 작품들을 이미 많이 봐왔다. 그나마 그 세 작품들은 양반이었더랬다. 뻔한 전기 영화로 전락할 수 있었던 각본을 영리한 플롯 재구조화로 각색해내 해당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시각 매체로써 유려하게 풀어내는 작품들이었지. 그러나 <플레이밍 핫>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직구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것. <플레이밍 핫>은 그저 주인공인 리차드 몬타녜스가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찬찬히 따라가기만 한다. 심지어는 영화가 내내 리차드 몬타녜스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기까지! 세상에 전기 영화로써 이보다 더 뻔한 전개가 또 있을까.
또, 앞서 말했듯 이 이야기가 실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영화가 너무 나이브하기만 한 것도 일을 키운다.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세상에는 분명 기적같은 순간들이 실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영화의 후반부, 리차드가 주위 사람들의 도움만으로 플레이밍 핫의 시장 인기를 견인했단 묘사에는 지나치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 안 그래도 판타지스러운 영화가 더 판타지처럼 느껴져버리는 부분.
<플레이밍 핫>에는 분명 이러한 단점들이 실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밍 핫>은 보는 이들의 마음 한 켠을 땃땃하게 데워주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상술하며 다소 나이브한 전개인 건 아닌가-하며 꼬집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같은 묘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함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언제나 느끼는 가족의 힘! 게다가 리차드와 그 가족들이 만들었던 플레이밍 핫의 시제품이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길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사실 그건 맞는 말이다. 작디 작은 씨앗이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그 안에 각자의 가능성이 움트고 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본인에게 물을 주고 햇살을 던져주는 일이다. 아, 당연히 성장엔 타인의 도움도 필요하다. 영화 속 리차드도 아내가 없었다면 진작에 좌절했을 것이고, 아들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희대의 맛을 찾아내는 데에도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공장에서 만난 멘토는 그가 포기하지 않게 붙잡아줬고, 동네의 친구들은 이유불문하고 그를 도와 플레이밍 핫의 진가를 전세계가 맛볼 수 있게 발 벗고 나서주었다. 여기에 치토스라는 산하 브랜드를 갖고 있던 거대 기업 펩시코의 당시 CEO 로저 엔리코의 관심과 지지 역시 리차드라는 가능성이 활짝 필 수 있게 만들어준 건 자명한 사실이지.
하지만 그 모든 도움과 지지들을 거꾸로 역산해보면, 그 소박한 시작점엔 늘 리차드가 있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아내에게 어쨌거나 먼저 다가간 쪽은 리차드였다. 아내가 낳은 아들들? 고생은 엄마보다 덜했겠지만 리차드도 엄연한 아빠로서 그들을 낳아내고 키워내지 않았나. 여기에 학교에서 차별을 당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상냥히 먼저 다가가 준 것도 아빠인 리차드였고. 어디 그 뿐인가? 공장에서 만난 무뚝뚝한 멘토에게 부러 먼저 사근사근 다가간 것 또한 리차드였다. 동네의 동년배들과 친구가 되고 또 가족을 이룬 이후에 먼저 다시 다가간 것도 리차드. 그리고 무엇보다, CEO였던 로저 엔리코가 사내 직원들에게 "CEO처럼 생각하세요!"라고 던졌던 고리타분한 멘트를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버리지 않고 소중히 주워내 정말로 'CEO처럼 생각'했던 것 역시 리차드였다.
악의도 그렇지만, 선의 역시 엄청난 체인 리액션을 불러온다. 어린 소녀에게 먼저 부리또를 건넨 것도, 아들들에게 먼저 상냥히 말을 걸었던 것도, 멘토에게,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간 것도, 그리고 자신이 말단으로 속한 거대 기업의 CEO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일견 허무맹랑해 보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한 것도 모두 리차드 몬타녜스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선의는 체인 리액션이 되어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모든 게 단순 '운'이었다 해도, 이같은 경우엔 그 '운'마저 리차드의 실력이었다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