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 말고 천사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by CINEKOON


1930년대 말,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던 소련. 그리고 그 스탈린의 사냥개가 되어 그저 좀 성가실 뿐이었던 인민들을 잡아다가 없던 죄도 뒤집어 씌워 총살 시키기 전문이었던 내무인민위원부, NKVD. 우리의 볼코노고프 대위는 그 악명 높은 NKVD에서도 동료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사냥개 중의 사냥개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느닷없이 NKVD를 척지고 도망치게 된다. 이젠 예전의 동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볼코노고프 대위. 먹잇감이 된 사냥개. 대체 그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NKVD를 탈출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처음엔 회의감 정도일 뿐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고문했던, 그래서 총살됐던 인민들이 알고보니 죄는커녕 별 이유도 없이 잡혀온 이들이라는 사실. 그렇게 명명백백하고 완전무결한 줄 알았던 조국이 그저 위정자들의 주지육림을 위한 놀이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마 볼코노고프 대위는 허탈함과 함께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딱 그 뿐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고로 그는 도망쳤다. 이건 아니다, 내가 원하고 또 생각했던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NKVD를 박차고 나간 그의 첫번째 동선이 연인 라냐의 일터였다는 점과, 그 곳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 도시 바깥으로 탈출하려 했던 점 모두가 그를 반증한다. 그는 그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우리의 볼코노고프 대위는 자신에 대한 애정보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컸던 연인에 의해 다시 쫓기게 되지.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가장 절친한 동료로서 '살아있던' 키도의 '죽어있는' 상태를 목격하게 됨으로써 기존의 동선과 계획을 180도 뒤집어버린다. 지옥에서 한창 고통받고 있다가 볼코노고프에게 경고키 위해 잠시 현생으로 다시 올라온 듯한 키도는 옛 동료의 창자를 잔뜩 움켜쥔채 말한다. 우리 모두 고통스러운 이 지옥에서 널 기다리고 있노라고. 하지만 만약 네가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죽기 전에 최소 한 명에게 진정한 용서를 받으라고. 오직 그 방법 뿐이라고 말이다.


여기서부터 볼코노고프 대위의 동선은 참으로 흥미로워진다. 그는 굳이 도망쳐나왔던 NKVD 본부로 다시 돌아가 죄가 없음에도 국가의 강압에 의해 헛되이 죽은 인민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 목록을 갖고 나온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권총 세례를 받은 것은 덤. 그리고 그는 그 서류 목록의 순서에 따라 도시 곳곳에 존재하는 유족들을 찾아 순례 아닌 순례를 다닌다.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진실을 고하고 잘못을 고백함으로써, 그중 누구에게라도 진정한 용서를 받아내기 위해서. 그래야만 내가 지옥에서 벗어날 것 아닌가.


얼핏, 볼코노고프의 이러한 결심은 유치해보일 수 있다. 아니,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지옥 가기 싫어서 저 고생을 다시 한다고? 특히 무신론자로서 신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에게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였다. 볼코노고프는 정말로 지옥이란 공간이 실재한다 믿는 건가? 설사 믿는다해도, 그토록 간단하게 지옥행을 면할 수 있을 거라고도 여긴다는 건가? 이 인간 정말 제정신인 건가?심지어 그는 지옥에서 벗어나겠단 마음을 부러 숨기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볼코노고프 대위는 유족들을 만나면서도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라는 말만을 바라고 또 기다리는 사람처럼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이렇게 순진무구한 사람이 있을 수가?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구원과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이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묘사해내고 있다. 비록 그것은 진정한 반성에서가 아니라, 그저 지옥행만은 면하고자 했던 마음뿐일 수도 있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던 알 바 아니고, 그냥 내세에서의 자신만 걱정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볼코노고프 대위는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 이전에도, 이미 그는 진실을 전달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구원 아닌 구원을 선사했다. 비록 용서는 받지 못했을 지라도, 또 유족들 중 누군가는 목을 매달아 자살했을지라도 최소한 그는 진실을 전파했고 그를 위해 용을 썼다. 물론 다소 결과론적인 발언이라 할 수도 있다. 허나 나는 그 시작점과 그 당시 품은 마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생각한다. 볼코노고프가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그같은 행위를 했건 아니건 간에 그는 회의감을 넘어 죄책감을 느끼고 끝내는 반성했다. 그게 구원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볼코노고프 대위는 며칠 내내 죽은 이후의 지옥을 고민했지만, 사실 그가 살고 있던 그 당시의 사회가 모두에겐 이미 지옥이었다. 국적과 체제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신념과 구원만큼은 끝내 스스로의 결정으로 선택한 사나이. 그리고 결국엔 그렇게 헛된 진실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알려낸 사나이. 어쩌면 이미 지옥이었던 그 곳에선 그가 천사였는지도. 애초 천사(天使)의 의미 자체가 하늘(天)의 사자(使),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내려온 자 아닌가. 그렇담 볼코노고프야말로 천사의 자질을 갖춘 자가 아니었을까?


7e29435a5b2218a8fb997d386a1b3c3c8aa19839.jpeg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 나타샤 메르쿨로바 & 알렉세이 추포프


이전 02화원자와 역사 사이, 인간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