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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un 01. 2024

그래도 우린 무대 위를 탐할 것이다

<드림 시나리오>


평범하디 평범한 중년의 남자, 폴. 대학 종신교수이긴 하지만, 지루한 그의 수업에 제대로 귀 기울여주는 학생은 없고. 심지어 자식이랍시고 있는 두 딸도 사춘기 핑계로 폴을 적당히 무시하긴 마찬가지. 근데 그렇다고해서 폴이 마냥 억울한 인간이란 건 아니다. 그게 죄라곤 할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폴은 때때로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하는 다소 불완전한 어른이거든. 충분히 어른스럽게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도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물론 그게 죄는 아니야. 사실 폴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면모가 조금씩 있잖아? 다만 우리는 익명성에 기대 숨을 수 있는 평범하디 평범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같은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것 뿐. 폴도 그랬다.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던 사람이 조금 찌질한 건 괜찮다. 헌데 그 사람이 갑자기 전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면?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말을 걸고 아는 체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그 때부터 그 찌질함은 진짜 죄가 된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전세계를 강타한다.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밤마다 폴의 꿈을 꾸는 것. 폴과 친분이 있든 없든, 그를 만난 적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사람들은 그냥 폴의 꿈을 꾼다. 꿈 내용은 물론 저마다 다르다. 굴욕적인 내용도 있고 야한 내용도 있으며, 이도저도 아닌 무미건조한 내용 역시 꾼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폴은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된다. 데면데면하던 어린 제자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와 그에게 함께 사진 찍어달라 부탁하고, TV 뉴스 등의 매체들도 모두 폴과의 프로젝트를 잡으려 안달복달한다. 이렇게만 들으면 마냥 신나기만 한데, 문제는 지금부터.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그가 나오는 악몽만을 꾼다. 꿈에 폴이 나와 자신을 고문한다거나 심지어는 죽인다거나. 원래 탑을 공들여 쌓는 것보다 그걸 한 방에 무너뜨리는 게 더 빠르고 쉽지 않은가. 폴은 순식간에 추락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직업을 잃은 뒤, 결국엔 집과 결혼생활까지 무너진다. 굳이 따지고 보면 그가 주체적으로 뭘 잘못한 건 없는데도 말이다. 


'만인의 꿈속 남자'란 다소 판타지적 소재를 들고 나왔지만, 영화는 누가 봐도 SNS로 대변되는 요즘 시대 문화에 대한 풍자다. 셀러브리티라 부르고 인플루언서라고도 불리는 사람들. 아니, 사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지. 그냥 우리와 우리 주변 모두가 다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하나같이 평범한 건 사실인데, 그 안에 은근한 출세욕구와 인정욕구를 품고 있는 거. 무엇으로든, 어떤 내용으로든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 <드림 시나리오>는 그같은 욕망이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위험한 것인지를 그 '만인의 꿈속 남자'로 비유해 보여준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캔슬 컬쳐가 얼마나 매섭고 공포스러운 것인지 역시. 물론 현실 세계 속 캔슬 컬쳐의 대상들 중 대부분은 그 이유가 명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당사자 입장에서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 심지어 <드림 시나리오>의 폴에게는 주체성이 정말로 없었다. 무슨 남동풍 부르려고 제사 지냈던 제갈량 마냥 폴이 사람들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북이랑 장구 치며 칼춤 춘 건 아니란 거지. 영화가 악착같이 폴의 관점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이미 주인공 폴에게 동화된 관객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해 속터지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감정 못지 않게 이성을 중시하고, 그래서 이 지구상의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도 가장 빨리 높은 탑을 쌓은. 그러다 결국엔 저 바깥 우주로까지 영역을 확장한 똑똑하고 고고한 종족, 인류. 하지만 그같은 업적들이 다 무색하게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이다. 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폴이 딱히 의도적으로 잘못한 건 없단 걸 아마 다들 알았을 거야. 하지만 그의 그 억울함보다는 매일 밤 꿈속에서 잔인하게 당하고만 있는 내 처지가 더 딱하고 분통터졌던 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극중 폴이 말했던 얼룩말처럼, 스포트라이트 아래 드러나 있는 것보단 그냥 익명성이란 무리 안에 적당히 숨어 있는 게 생존전략상으론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어딘가 조금씩 찌질하고 닳아있기에. 그걸 모두 보수하고 100%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건 예수나 부처 외엔 불가능하기에. 고로 무대 위에 굳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그냥 그 아래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근데 아까 말했잖아, 이성적이면도 때때로는 보다 더 감정적인 게 인간이라고. 이렇게 깨닫다가도 어차피 우린 다시 SNS를 켜고 사진과 글을 공유할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단 그 은밀하면서도 당연한 욕망 때문에. 


<드림 시나리오> / 크리스토퍼 보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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