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
가족. 우리는 누구를 가족이라 부르는가. 생물학적 친부와 친모가 그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 가장 먼저 들어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조건은 될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생물학적 친부모가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 친부모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가족이 될 수 있단 건 아니란 소리. 그래서 비록 영화의 제목은 '대가족'이지만, 가능만 하다면 난 이 영화의 제목을 '대식구'로 바꿔부르고 싶다. 먹을 식(食)에 입 구(口)를 쓰는 '식구'말이다.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굳이 피와 유전자로 묶여있지 않아도, 함께 밥과 추억을 나눠먹으며 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가족>을 '대식구'에 대한 영화로 받아들였다.
출가해 스님이 된 문석에게, 그의 시봉인 인행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소싯적 자신이 속세에서 형사 노릇을 하던 시절에 마약사범을 하나 검거해 산길을 내려오던 상황. 마약사범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돌이 가득한 개울가 언저리에서 대변을 눈다. 그가 볼 일을 다 마치고 이제 일어서려는데, 당시 형사이던 인행스님은 대변을 그냥 활짝 열어두고 갈 순 없으니 그 위에 돌이라도 쌓으라 말한다. 그렇게 더럽고 흉측한 대변을 가리려 그 위로 덮고 또 쌓아뒀던 돌들. 헌데 그게 시작이 되어 그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그 올려진 돌들을 따라 주변 곳곳에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결국 그 개울가는 높이 올려쌓아진 돌탑들의 모습에 장관을 이루고.
인행스님의 그 이야기는 <대가족>이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의대생 시절의 문석은 당시 여자친구의 병원장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의 심정으로 정자 기증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같은 묘사는 코미디 영화임에도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반쯤 강요 당한 정자 기증에, 심지어는 우생학에라도 심취했던 것인지 그 병원장은 그 정자를 한 두 군데도 아닌 백 몇 곳에 기증함으로써 문석에게 생물학적 자녀들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어찌되었든 문석 입장에서는 참으로 분통 터질 노릇이고, 그걸 스크린 밖에서 지켜보는 관객으로서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안고 갈 수밖에.
그러나 그같은 불편함을 차치하고 본다면, 문석의 그 행위는 참으로 소중한 여러 인연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는 또 그의 아버지 무옥을 통해 세상 모든 이들을 부모로 여기고 또 자식으로 여기는 부처의 마음으로써 피어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노스님의 말이 또 마음 속에 맴돈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이고, 부모에게 아이는 신이다. 무능한 신. 그러나 모든 부모는 그 무능한 신을 섬긴다."
우주와 신의 만남. 함께 한 지붕 아래서 밥과 추억을 나눠먹는 두 존재의 거대함. <대가족>을 보며 식구와 관련해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소 오버스러운 깨달음이지만, 어쩐지 그 깨달음이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