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온>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해 북적이는 로스엔젤레스 공항. 그곳에 우리의 주인공 코펙이 있다. 한때는 경찰의 꿈을 꾸었지만, 거듭되는 시험 낙방으로 결국엔 공항의 안전요원으로서 일하게 된 그.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에 온전히 만족하며 집중하는 사내는 또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안전요원 업무도 어차피 원해서 시작한게 아니었으니 적당히만 하다 퇴근하자는 보신주의적 태도. 그렇게 그는 항상 다음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다음엔 무언가가 있을 테니 일단은 대충하고 보자는 심산. 그러던 그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진다. 함께 동거 중인 연인의 임신, 그리고 자신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면 누군가 죽는 일은 없을 거라 차분하게 협박하는 테러리스트의 사근사근 귓속말.
시간적 배경으로 크리스마스 연휴를 상정해뒀다는 점, 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는 공항을 설정해뒀다는 점에 있어서 존 맥클레인의 <다이 하드>가 떠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영화다. 게다가 주인공도 부부 사이 문제를 갖고 있는 남성에 그와 테러리스트 사이 대화가 통신을 이어진다는 점 역시 <캐리온>을 <다이 하드>의 적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부풀어 오른다. 왜냐면 내게 있어 <다이 하드>는 절대적인 액션 영화고 또 만고불변할 크리스마스 영화거든. 그런데 그 <다이 하드>의 아류 신작으로써 출사표를 써왔다? <캐리온>에 거는 나의 기대와 걱정 역시 그래서 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캐리온>은 <다이 하드>를 넘어서지 못한다. 후발주자라는 태생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감격한 것은, 그 안에서도 <캐리온>이 나름의 고군분투를 해내고 있단 점이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다이 하드> 아류작들이 그러했듯, 그저 위대한 선배 영화의 그림자 안에서만 노니는 것으로 <캐리온>은 만족하지 않았다. 거기엔 촬영과 편집 등을 위시한 기술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있고, <다이 하드>를 승계하면서도 적절히 변화구를 던진 각본의 분투가 있었으며 또 브루스 윌리스와 알란 릭맨의 조합엔 비비지 못할진대 그럼에도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낸 듯한 적절한 캐스팅의 전략이 존재했다. 어쩐지 보신주의적 태도로만 일관하던 영화의 주인공 코펙과는 달리, 영화 제작진들은 어떻게든 뭔가 해보려고 용을 쓴듯한 모양새다.
공항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다루면서도 그 재료를 최대한의 방법으로 요리해보려했던 액션 시퀀스 설계들 역시 좋다. 그리고 주인공과 테러리스트 사이 만남이 생각보다 신속히 이루어진 점 또한 그 의외성이 마음에 들었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내내 답답한 부분들이 꽤 많긴 하다. 테러리스트가 제아무리 주도면밀했다 해도 주인공의 몇가지 행동 양태는 답답함을 넘어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여기에 그 테러리스트의 목적과 동기마저도 생각보다 뚜렷하지 못해 아쉬웠다. 특히 이 테러리스트는 범죄 컨설턴트라는 꽤 흥미로운 직업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 더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그 주인공과 테러리스트 사이 마지막 대결 장면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허무했을 뿐더러 앞에 쌓아놓은 긴장감과 감정들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참으로 미지근한 클라이막스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의 속삭임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주인공의 면모와 그 변화는 여전히 인상적으로 관객들 마음에 남겨진다. 내가 꿈꾸던 지금이 아니니 대충 살다가 의문의 미래를 맞이하자던 주인공의 안일한 태도. 그 보신주의적 태도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맞닥뜨린 사건들로 인해 시나브로 변화를 맞이한다. 항상 미루고 붕 떠 있던 코펙의 마음들은 결국, 절대다수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일련의 몸부림들을 통해 바로 지금에 착 하고 안착한다. 언제 올지 모를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한 뜀박질과 주먹질. 코펙의 그 뜀박질과 주먹질은 왠지 모르게 느슨해져있던 요즘의 나를 은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캐리온>은 <다이 하드>와 감히 견주기에 부족함이 너무 많은 영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주인공의 분투가 끝끝내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선 코펙, 그는 당연히 존 맥클레인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뜀박질과 주먹질, 그 몸부림에서 나는 얼핏 존 맥클레인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존 맥클레인 또한 자신의 후배가 된 이선 코펙에게 은근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