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통의 삶엔 사랑의 고통이 특효

<노보케인>

by CINEKOON


그 옛날,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은 말했다.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근데 그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그냥 무통한 삶이 되어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과연 백사장도 무릎을 치며 "잘됐다, 야!"라고 격려해줄까? 아니, 그 전에. 그렇다면 고통이란 건 대체 왜 있는 건데?


신경생물학적인 이유는 명백하다. 고통이 없었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별 생명체는 진작에 다 죽었으리라.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가 아파야만 인간은 그를 인지하고 치료할 테지.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피를 흘리든 말든 그냥 뒀을 거다. 그럼 차츰 골로 가는 거고. 그러니까 고통은 우리의 몸이 발부하는 경고이자 사이렌이다. 계속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하던 일 멈추고 치료부터 하라는 거지. 그러니까 고통은 곧 삶을 위한 경고. 헌데 <노보케인>의 주인공인 네이선 케인은 희귀병으로 말미암아 선천적으로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 남자의 삶엔 경고등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도 없는 것. 음식물을 치아로 씹다가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있으니 평생 스무디만 갈아마셔야 한다고 하니 말 다 했다.


그런 네이선 케인의 삶은 짐짓 무료해보인다. 삶에 도전이란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무통의 삶은 이렇게 의지박약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하지만 네이선에게도 고통의 순간은 찾아오나니...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고통! 몸이 아프지 않다 그랬지 누가 마음까지 아프지 않다 말했나. 네이선 케인은 자신이 일하던 은행에서 무장강도들에 의해 연인 아닌 연인 셰리가 납치당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모험에 뛰어든다. 경찰차를 빼앗고 총을 거머쥐며, 이후엔 비록 우발적이었던 데다 정당방위였다 하더라도 사람까지 죽인다. 사랑의 고통이 이토록 무섭다.


<노보케인>은 주인공에게 골라도 참 애매한 초능력을 골라 부여해줬다. 완력이 강하다거나 맷집이 좋은 게 아니다.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 그로인해 총 맞고 활 맞고 칼 맞느라 몸은 점차 너덜너덜해지는 데에 반해 그러거나 말거나 네이선 케인은 셰리 하나 찾겠다고 온 도시를 누빈다. 영화가 그런 네이선의 초능력을 잘 묘사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워낙 특이하고 애매한 초능력인지라, 이걸 액션 연출적으로 잘 살리기 무척이나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헌데도 <노보케인>은 끝끝내 한 마디를 내게 남겼다. 내 인생의 햇살 같은 사람이 위험에 빠졌다면 과연 손놓고 다른 이들에게 그 해결을 맡길 수 있겠는가. 네이선은 경찰도, 전직요원도, 수퍼히어로도 아니었지만 그저 셰리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그런 네이선의 행보가, 내게 있어선 너무나 영웅적으로 보였다. 능력이 있든 말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가기 시작한 인간의 숭고함.


의지없는 무통의 삶엔 사랑의 고통이 특효인가 보다. 온몸이 박살나가면서까지 끝끝내 셰리를 구해내는 네이선 케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그 악랄한 백사장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잘됐다, 야!"


tempImagerjWoBt.heic <노보케인> / 댄 버크 & 로버트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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