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대로 믿는다. 믿는대로 보인다.

<계시록>

by CINEKOON


엘비스 프레슬리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란 뜻을 품은 자신의 곡을 통해 우리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경이들이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노래했다. 어쩌면 그 말엔 일리가 있다. 아니, 적어도 공감은 된다. 무신론자인 나로서도 여행하면서 만난 이 세계 곳곳의 대자연 등을 보며 혹시라도 정말 신이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해본 바 있기에. 그런데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존재한다면, 그걸 거꾸로 뒤집어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란 명제 또한 가능할 것이다. 보아서 믿는 걸 넘어, 믿는대로 보는 것. <계시록>은 극중에서도 직접 언급하는 아포페니아를 통해, 믿음에 한껏 경도된 존재가 무얼 보고 또 그럼으로써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가만히 응시한다.


아포페니아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둘 이상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로 묶어 인지하려는 심리적 경향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예를 들긴 쉽다. 우리는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후면을 보면서 서로 다른 표정을 지닌 인간들을 떠올린다. 심지어는 전기 콘센트의 두 구멍에서도 굳이 인간의 얼굴을 그려낸다. 그렇듯 인간은 항상 비인간적인 물체 또는 현상에서 인간을 연상시킨다. 거기서 그냥 끝나면 모르겠지만, 이제 그 연관성에 굳이 의미까지 마구 부여해내기 시작하면 그건 그거대로 또 문제가 될 수 있는 거지.


<계시록>의 주인공 성민찬은 개척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신의 계시를 인지한다. 어쩌다 마주친 이는 출력되어 프린터 위에 놓여진 사진에 물방울이 점차 번져감으로써 그가 악마임이 드러난다. 또 그런 그를 우발적으로 낭떠러지에 떠밀은 민찬 앞에, 천둥과 번개 등의 극적 효과로 예수님이 직접 강림하사 그 노고를 치하한다. 그 이후도 쭉 이런 식이다. 죽은 줄 알았던 권양래와 다시 조우한 민찬은 그 곳에서 구름을 통해 찾아온 천사랑 대면한다. 어디선가 단내가 풍겨오는 듯 했던 장면에서는 목양실 한쪽 벽면의 장식물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민찬을 찾아오고. 그런 일련의 순간들을 거쳐, 민찬은 신의 계시를 받았답시고 권양래를 죽이려 했다. 권양래가 제아무리 성 범죄자라 해도 살인은 살인이다. 심지어 다른 누군가도 아니고 교회 목사가 살인을 저지르려 했단 점에서 더 한숨이 나오고.


비록 개신교만을 통해 묘사하고 있지만, <계시록>은 어떤 종교가 됐든 그 신을 등에 업고 그것만이 옳다 진심으로 섬기며 다른 이들을 찍어내리려드는 포괄적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크리스쳔이나 힌두교도, 무슬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로 가장 무서운 존재들은 자신 빼고 세상 모두가 틀렸다 여기는 원리주의자 및 극단주의자들이다. 이토록 다양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만을 옳다 여기며 나머지 모든 것들을 모조리 다 꺾어버리려는 사람들. 물론 이 세상에도 '진리'라는 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무신론자임에도 정말 신이 있다면 그가 지금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든간에 원리주의와 극단주의는 아마 그조차 배격할 거라 나는 믿는다.


영화적으로는 좋은 부분만큼이나 나쁜 부분도 많다. 가장 아쉬운 건 갑자기 끝나버리는 듯 느껴지는 영화의 후반부 리듬이다. 솔직히 말해 리듬 하나만 놓고 보아도 한 편의 장편 영화란 느낌보다는 8부작쯤 되는 드라마의 1화처럼 여겨졌다. 여기에 더해 개연성까지 잃어가며 지나치게 친절히 배치해둔 설명들도 안쓰럽다. 외눈박이 창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으로 그렇고, 무려 10여 km를 달려왔는데도 엄청난 접착력으로 민찬의 차 타이어에 기를 쓰고 붙어있던 오디 열매 등도 그렇다.


다만 소재 및 주제적으로 '계시'와 '오해'를 다루고 있는 영화란 점에서 정상참작이 약간은 된다. 극중 세계관에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 개연성들이 다 해결되기 때문이다. 신이 민찬의 그릇된 믿음과 그로인한 악행을 바로 잡고 싶었기에, 연희가 정의를 대리할 수 있도록 그런 힌트들을 조금씩 흘려줬다고 믿으면 그만이라서. 아영을 구하려 외눈박이 창에 대한 설명을 연희의 아버지에게 배정해두셨고, 민찬을 벌하려 오디 열매에 그 접착력을 약속하셨다 말하면 얼추 말은 된다. 소재와 주제가 이 영화의 약한 개연성에 대한 큰 핑곗거리인 셈.


아포페니아로 빚은 누미노제. 믿음 앞에 선 인간은 이렇게나 얕고 그래서 섧다. 과연 영화의 결말 이후 민찬은 어떤 여생을 살게 될까. 신의 계시라 믿었던 게 알고보니 악마의 속삭임이었노라 계속 믿게 될까? 아니면 그게 그저 자신의 착각과 합리화를 위한 망상뿐이었단 걸 깨닫게 될까? 지금까지 보아온 인간의 나약한 모습들을 돌이켜보면 슬프지만 아마 전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tempImagehnnoi5.heic <계시록> / 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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