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줘요 특공대

<썬더볼츠*>

by CINEKOON


라이벌 브랜드 DC에서 비슷한 팀이라고 할 수 있을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멤버들은 대개가 악당 또는 악동 수준에 있었다. 그들은 진짜로 나쁜 인물들이었으며, 때로는 순수하고 가족적인 면을 보였을지라도 그 근본은 돈 혹은 즐거움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마블의 썬더볼츠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그들 중에도 돈 받고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빌런'이라기보다는 '루저'처럼 느껴진다. 루저. 서양권에서 쓰이는 이 말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아마 국내에선 '찌질이'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루저'라는 단어의 뜻을 곧이 곧대로 직역해 썬더볼츠 멤버들에게 부여하고 싶다. '패배자'말이다. 그만큼 썬더볼츠는 악당들 연합이라기보다는 패배자 집단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썬더볼츠의 패배자들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악당들보다 조금 더 우리에 가깝게 느껴진다. 커다란 총과 죽창을 신이 나서 휘둘러 본 적은 없어도, 저마다의 싸움에서 패배해본 적은 다들 한 번쯤 있을 테니까.


썬더볼츠의 멤버들을 실패자로서 사로잡고 있는 건 다름아닌 공허와 허무다. 그리고 그 공허와 허무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후회를 동반하며, 또 그 후회는 자기혐오를 친구마냥 데려온다. 친언니나 다름없던 나타샤를 잃은 후, 옐레나는 줄곧 자기혐오에 빠져있다. 후회스런 과거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거기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게 그 자기혐오의 주된 이유다. 인간병기로 길러졌고 그에 대한 반성도 하고 있으나, 여전히 거기서부터 벗어나진 못한채 그저 반복적인 후회만을 견지하고 있을 뿐인 상황. 벗어나려면 가상한 용기가 필요한데 혐오스런 자신이 과연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그녀는 밥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괜찮은 척하며 그 모든 문제들을 마음 한 켠 저멀리 어딘가에 구겨넣고 잠가버렸다.


그외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다. 레드 가디언으로 기막힌 왕년을 보냈던 알렉세이는 과거의 덫에 빠져 제대로 현재를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반대진영엔 오히려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버키가 있다. 세뇌당한 암살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하원의원이 되어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보려 하는데, 이 망할 정치는 너무나도 복잡고 어렵다. 차라리 누군가를 죽였던 시절이 더 간단했을지도. 존 워커는 한때 존경받던 엘리트 군인이었으나 스스로의 실수로 가족과 명예 모두를 잃고 속절없이 추락해 모두를 마냥 비꼬기만 하는 얄미운 인간으로 전락했고, 고스트로 활동하는 에이바 역시 일평생 육체가 희미한 상태로 살며 그 이명만큼이나 발붙일 곳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이미 패배한 자들 앞에 나타난 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해보이는 강화인간 센트리다. 가장 이상적인 백인의 이미지 금발벽안으로 완성된 초인. 이 너무나도 강대한 존재 앞에서 썬더볼츠는 오월동주 이합집산을 펼치다 대판 깨진다. 역시 우리는 안 되는 걸까? 힘과 속도, 근성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완전하게 밀리는데... 어차피 너나 나나 갱생하긴 어렵고, 인생이란 이 빌어먹을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더더욱 힘들었어. 어쩌면 그냥 우리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피차 서로 만난지 얼마 안 된, 그러면서도 사이는 또 안 좋은 그런 관계였잖아? 그러니까 다 그만두고 그냥 각자 갈 길 가자고!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을 하나로 묶고 또 갱생과 승리의 기회로 이끄는 것 역시 다름아닌 센트리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의 또다른 모습인 보이드라고 해야겠지. 보이드, 그러니까 공허. 공허와 허무가 뉴욕을 잠식해나간다. 근데 잠깐. 썬더볼츠 멤버들은 이미 그 공허와 허무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후회와 자기혐오가 어떤 맛과 냄새를 풍기는지 이미 다 겪어봤던 사람들이잖아?


PTSD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하나같이 다 비슷한 기본처방을 내린다. 제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는 증상이라해도 그게 누구든 좋으니 그냥 터놓고 이야기하라는 것. 그게 바로 PTSD 치료의 시작이라는 것. 헌데 만약 그 대화의 대상이 PTSD를 잘 알고 이해하는 유경험자다? 그럼 그만큼 더 좋은 대화상대이자 기본처방은 또 없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바로 그렇기에. 밥을 구하기 위해 자신도 이미 겪어본 적 있던 트라우마 속으로 옐레나는 뚜벅뚜벅 걸어들어간다. 이어 알렉세이와 버키, 존 워커와 에이바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모두 밥의 트라우마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화룡점정. "나 여기 있어"라는 말과 함께 곁들이는 포옹. 공허와 허무를 허무는 유일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썬더볼츠는 그렇게 * 기호로 말미암아 지구 최고의 영웅 집단으로 거듭난다.


블록버스터 시즌의 포문을 열어젖히는 마블 영화에서 그 클라이막스를 화려한 팀업 액션 대신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포옹으로 대체했다는 점이 놀랍고 재밌다. 물론 수퍼히어로 장르의 재미는 기본적으로 화려한 액션 스펙터클에 있기에, 일부 실망한 팬들의 반응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결국 그 포옹으로 귀결될지언정 그 조금 앞부분에는 액션이 더 있음 어땠을까 싶었으니.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구도도 딱 마음에 들긴 한다. 다만 이 팀을 좀 더 오래보고 싶은 마음에, 영화의 결말부 선택이 반쯤 맘에 들면서도 반쯤은 아쉬웠다.


"나도 네 맘 알아"라 시작하는 위로의 방식이 어쩌면 너무 가식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설령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고는 해도 과연 상대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듣고 싶을까 싶었던 거지. 하지만 살다보니 그 공감의 말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말이라는 걸 점점 실감해나가고 있다. 당신이 겪은 그 일과 당신 마음의 무게를 안다는 말. 그러니 손 한 번 잡아보자고, 있는 힘껏 한 번 안아보자고 건네는 말. 이 공허와 허무, 후회와 자기혐오, 그리고 분노와 대립의 시대에 위로가 담긴 말과 포옹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다.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진실이다. 진리란 원래 그토록 뻔한 것이다. 


tempImagetqvKSI.heic <썬더볼츠*> / 제이크 슈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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