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근미래의 도쿄. 그 곳에 유타와 코우가 있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친구 사이로 이어져온 두 사람. 그런데 그 두 친구의 앞날이 흔들린다. 도쿄가 지진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뒤부터.
음악과 디제잉을 사랑하며 어차피 한 번 살다 죽는 인생 신나게 즐기며 살자는 베짱이 유타. 언뜻보면 코우 역시 비슷한 삶의 가치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가 그런 유타에게 줄곧 맞춰왔던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로 조금씩 달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 다 같은 대접을 받아 마땅한 일본 국민이다. 하지만 극우파 총리와 그 일당들의 기준에 따르면 유타는 뼛속까지 제대로 된 일본인인 반면, 재일 교포 4세인 코우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말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이주민이다. 베짱이처럼 아무 걱정없이 해맑게 웃으며 즐기는 유타에 비해 코우가 불만 많은 표정으로 뚱하니 앉아있는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세상을 반영하고 그로써 그 세상에 다시 영향을 돌려주기 마련이다. 영화 역시 그렇다. 2017년, 트럼프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네 세계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극우화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영향으로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중반까지 그런 세계 경향을 반영하고 또 경고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미국 영화계는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예술영화들에서부터 시작해 블록버스터 등의 주류 영화들까지 두루 포괄하며 벽과 경계, 이민과 차별, 인종과 계급 등의 갈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정점은 감히 말하건대 2020년의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것일 테다.
이후 제 2 트럼프 시대가 시작된 지금, 미국 못지않게 여전히 극우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에서 <해피엔드>가 숙성을 거쳐 튀어나왔다. 조지 오웰의 소설 속 빅 브라더를 떠올리게끔 만드는 학교내 감시 시스템, 이민과 이민자에 대한 불평등, 헌법상 보장되어야 할 시위 및 집회의 권리를 폭력으로 진압하거나 교묘한 프로파간다로 파행시키는. 여기에 한 국가의 총리든 한 학교의 교장이든,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그 아랫사람들을 갈라치기함으로써 자신의 수단을 정당화해낸다. <해피엔드>가 그려내는 세상은, 근미래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어쩐지 미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히피 같은 삶을 추구하는 유타는 코우에게 말한다. 길거리에서 소리 지른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그러니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하루하루 즐겁게 살자고. 물론 그 말에 어느정도의 일리는 있고, 또 그게 유타가 고집하는 그 자신 삶의 철학이라면 괜시리 건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기에 만약 우리가 하루살이였다면 정말로 그렇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오늘만 살다 내일 죽을 단발성의 인생이라면 미래를 바꿀 필요가 없을 테니. 교장도 말하지 않나, 지금 바로 감시 시스템을 철거하더라도 당장 곧 졸업인 너희 학년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우리에겐 내일이 있고 다음 세대가 있다.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10년 뒤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뒤에는 우리의 자식들이 지금으로부터 50년 뒤건 100년 뒤건 살아갈 것이다. 그건 곧 내일을 지켜야만 한다는 소리다. 코우가 재일교포 4세인 건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근미래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설정된 세대겠지만, 그는 재일교포 2세도 아니고 3세도 아닌 4세다. 그의 어머니는 교장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싹싹 빌며 아들을 용서해달라 말한다. 그녀는 그렇게 재일교포 3세로서 일본사회에 녹아들고자 최선을 다해 조용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삶의 태도를 비난할 순 없다. 그녀의 그 노력을 이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갔을 재일교포 1세와 2세, 3세들의 역사가 지금의 재일교포 4세 코우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코우는 그게 쓸모없어 보일지언정 길거리에 나가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 그의 시간 뒤엔 재일교포 5세와 6세, 그리고 7세와 8세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코우와 대립 아닌 대립을 하지만, 결국 또 학교내 감시 시스템을 철거시키는데에 일조하는 것은 그가 아닌 유타다. 하루하루를 베짱이처럼 살아가자던 유타. 그러나 그는 전날 밤 코우와 경찰들 사이 짧은 실랑이를 직접 목격한다. 그리고 그로인해 코우의 지난 삶과 앞으로의 삶을 촌철살인으로 체화하게 된다. 유타가 코우 대신 독박을 쓴 경위엔 그와의 우정도, 의리도 있었을 테지만 전날 밤 경험한 그 체화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나는 단언한다. 인간은 직접 보고 듣고 겪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생동감 넘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전세계를 실시간으로 물들이고 있는 파시즘을 꺼내 까내리는 작품.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나. 경제 대공황 이후 파시즘이 득세해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졌던 20세기 초중반의 흐름이 어째 요즘 다시 보이는 것 같아 그래서 두렵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최근 파키스탄과 인도까지 싸움을 더 키워가고 있다. 푸틴부터 시진핑, 김정은, 그리고 트럼프까지 강력한 원맨 정권들이 세계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이 무섭고 두려운 흐름 속, 그래서 <해피엔드>의 아이들이 더 대견하게 여겨졌다. <해피엔드>의 제목처럼, 이 세계 곳곳에 행복한 마무리가 깃든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