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전쟁>
기업간 법리 다툼과 주식 투자 등을 다루는 실화 소재의 경제 역사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동류의 작품들이 부쩍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 <국가부도의 날>도 그렇고 <덤 머니>도 그렇고. 그리고 이번엔 <소주전쟁>이다. 확실히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빅 쇼트>의 영향이 크긴 컸던 모양.
하지만 <소주전쟁>은 거기에 범죄 누아르적 면모를 더한다. 예컨대, 이제훈이 연기하는 인범은 곧 <신세계>의 이자성이다. 자신이 곧 무너뜨릴 조직의 내부로 태연한 표정을 하며 들어가 그곳에서 인정을 받고 정보를 탈취해오는 인물. 그 과정에서 이자성이 정청과 의형제를 맺었던 것처럼, 인범 또한 국보의 이사 종록과 마음을 나눈다. 소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종록의 집에도 가 소파에서 잠을 퍼질러 자는 인범. 그간 일에 몰두하느라 아내와 딸 모두를 잃었던 종록이기에, 그에게 인범은 이른바 새로운 동생 또는 새로운 가족 같은 그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예정된 배신은 그대로 찾아오고 결국 그 둘이 다시 대면하게 되는 곳은 차가운 법정에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모든 것은 그저 돈 버는 일일 뿐이라며 선진금융기술로 국보를 무너뜨리려는 인범. 그리고 이에 맞선 종록은 돈을 보기에 앞서 그 뒤의 사람을 먼저 느껴라 말하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돈만 벌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허용되는 거라고? 그렇다면 그에 따라 일자리를 잃고 아이들 학비에 생활비까지 더 대지 못해 길거리로 나앉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는 것 역시 당연한게 되는 거고?
선배 경제 역사 드라마 영화들이 그랬듯, <소주전쟁> 역시 돈 vs 사람의 가치를 앞세워 영혼을 건 전쟁을 묘사해나간다. 다만 그 묘사가 짐짓 좀 뻔했고, 전체 전개에 있어 급박한 부분들도 있었다. 상술했듯 <무간도>나 <신세계>, <도니 브래스코>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는 영화이다보니 극중 인범과 종록이 얼마나 가까워지느냐가 후반부의 배신에 더 큰 무게추를 실을 수 있었을 테다. 허나 그 둘의 친분은 금세 만들어지고 금방 지나가버린다.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밀하고 친근하게 묘사했더라면 이후의 배신과 갈등이 더 애처롭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구원하는 건 다름아닌 유해진의 얼굴이었다. 특유의 소탈한 얼굴로 그가 눈물을 주륵 흘릴 때, 나도 괜시리 두 볼이 얼얼해졌다. 특히 배신 당한 이후 오랜만에 인범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에서의 그 눈물은 연출도 참 좋았더랬지. 보통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면 그 표정을 정면 클로즈업을 담기 마련이지 않은가. 하지만 <소주전쟁>은 눈물 흘리는 종록의 얼굴을 그냥 와이드한 쇼츠 상태로 편집없이, 정면 얼굴 없이 그저 담아냈다. 그래서 그 쇼트 속 그 눈물은 더 진짜처럼 보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제 누가봐도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는 나라이건만, 그 전에 IMF가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기조가 2025년 바로 지금의 이 시대에도 그 그림자를 조금씩 다시 드리우고 있다. 내수는 침체됐고 수출은 불안한 국제 정세와 관세에 막혀 궁지에 몰렸다. 가게들은 간판을 내리고 임대문의라 적힌 팻말을 대신 단다. 환율과 물가는 올랐는데 급여엔 변함이 없다. 불안한 마음, 불안한 시대. 이 시기에도 저기 저 높은 곳에 있으신 분들은 엑시트니 뭐니 하며 더 떨어지기 전에 고점에서 가진 거 다 팔고 나가자 말한다.
<소주전쟁>에서 날 애틋하게 만들었던 건 주인공 종록과 그 주변 회사원들의 태도였다. 대기업이라고 해봤자 결국 그거 다 재벌 회장들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던 회사원들은 그 모든 게 마치 다 자기 것인양 뛰고 서두르고 긴장하며 회사를 지키려 했다. 그 모든 게 마치 다 자기 것인양 여겼던 그 때 그 시절의,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시기의 마음들이 너무 귀했다. 그리고 그래서 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