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너스 - 죄인들>
어둔 밤, 외딴 주점에서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수성전을 펼치며 새벽 해가 뜰 때까지 버틴다는 점에서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가장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따로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조던 필의 <겟 아웃>.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은 단순히 흑인 감독이 흑인 배우를 기용해 다룬 흑인 역사 소재의 공포 영화란 점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공통점처럼 느껴지는 것은, 은유와 상징성 측면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해석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는 점. 그러니 <겟 아웃>이 그랬던 것처럼, <씨너스> 또한 다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그 진가를 드러낸다.
마이클 B 조던이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스모크와 스택, 쌍둥이 형제. 이런 영화들이 쌍둥이를 다룰 때 으레 그렇듯, 두 사람 사이 성격 차이는 명확하다. 형인 스모크는 매사 진중하고 원리원칙을 중히 여기는 반면, 동생인 스택은 다소 즉흥적이며 유쾌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의 키 컬러 역시 다른데, 스모크는 아일랜드 갱스터를 연상시키는 푸른 헌팅 캡을 썼고 스택은 이탈리아 마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페도라로 멋을 냈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두 나라는 이 영화에서 다른 형태로 여러 차례 다시 인용된다. 아일랜드 라거라거나, 이탈리아 와인이라거나. 여기에 색의 상징성까지 더하면 푸른색은 보통 물 등과 연동되어 치유와 정화 등을 의미하고, 반대로 붉은색은 그 자체로 피를 안 떠올릴래야 안 떠올릴 수 없게 하는 색이다. 그리고 보통 정욕, 욕정, 욕망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스모크와 스택 쌍둥이 형제는 그 첫등장에서부터 이미 그들 각자의 결말을 관객들에게 암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힙합, 재즈와 더불어 또 하나의 흑인 음악이라 부를 수 있을 블루스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사실 뱀파이어 영화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음악 영화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씨너스>에서 음악의 비중은 큰데, 놀랍게도 영화가 촌철살인의 오프닝 등으로 말미암아 음악이 호러를 끌어들이는데에 전혀 이물감 없도록 조율해놨다. 그러니까 한국인인 우리 못지 않게 미국의 흑인들에게도 한이라는 그 특유의 정서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게 블루스란 음악으로 자연스레 표출됐던 거고. 헌데 음악이란 건 종종 영적인 측면과도 연결되지 않나. 종교들도 그를 잘 이용해내잖아. 교회와 성당에 건반이 있고 또 찬송가가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절에서 외는 불경도 그 특유의 리듬 덕분에 가끔은 음악처럼 들리지 않나. 사실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무속신앙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꽹과리와 장구 등이 그 호쾌한 음으로 수놓는 우리네 굿판. 그러니까 음악은 곧 영적인 세계로의 게이트를 여는 특급 열쇠로써 여러 문화권에서 사용되어 왔다.
음악과 호러를 잘 접합해낸 덕분에 <씨너스>는 묘한 설득력을 얻는다. 극중 미래의 블루스 킹이 될 새미는 목사인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서의 이야기를 표현해낸 블루스를 연주하고 또 부르며 자신도 모르는새 뱀파이어들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모여든 이 뱀파이어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집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렘믹은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아일랜드 민요로 화답하며 새미를 탐내고. 뱀파이어 영화들이 각자의 뱀파이어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사실 엿장수 마음대로다. 어차피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들일진대, 납득가는 개연성만 있다면 어떻게 설정하고 표현해도 좋은 것. 그 방면에서 <씨너스>는 인상적인 접근법을 취했다. 기본적으로 <렛 미 인>이 더 널리 알려낸 뱀파이어들의 '초대받지 못하면 실내로 진입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토대로 하되, 가족을 빼앗아 자신의 가족을 불리는 집단으로써 <씨너스>는 당대의 공포를 뱀파이어란 존재들 안으로 녹여냈다.
녹여낸다는 말.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흑인들, 특히 미국의 흑인들이 요즘들어 부쩍 그 말을 두려워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겟 아웃>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흑인들은 키도 크고 유연해. 살도 보드랍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겟 아웃>에서의 인종주의자들은 그렇게 흑인종을 타자화시킨 뒤 마치 물건 고르듯 골라 그 신체를 강탈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잃고 또다른 누군가에게 물건 팔리듯 팔리고 제공된다는 공포. 그 비슷한 공포가, <씨너스>에도 살짝 서려있다. 굉장히 흥겨운 민요를 이미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일랜드 출신 백인인 렘믹은 새미의 음색과 블루스를 탐내며 그가 자신의 일원이 될 것을 강요한다. 흑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다 녹여버린 뒤 우리 문화 안으로 편입되라는 명령. 어떤 문화든 다 먹어치워내겠다는 욕망. 어쩌면 그것이 현대 미국의 욕망 아닐까?
캐나다는 이민자들의 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샐러드볼' 같은 방식을 취한다고들 한다. 각자의 문화는 존중하고 그대로 냅두면서도, 그 자체로 캐나다 사회 안에 자연스레 섞이길 추구하는 방식. 반면 미국의 접근법은 흔히들 '멜팅 팟'이라 부른다. 당신이 어떤 문화를 갖고 있든 미국 땅을 밟았으면 다 녹여낸 뒤 한데 뒤섞어 합쳐버리자는 발상. 짐짓 다원주의적 접근인가 오해를 부르지만 실상은 무척이나 일원주의적이다. 물론 그 방식의 장점도 있겠지만 말이다. 저멀리 흑인들의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들에게 건너건너 이미 다 들었던 이야기 아닌가. 미국에서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끼리 영어로만 소통하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는 이민 1세대들의 후일담들 말이다. 그래서 뿌리를 잊지 않게끔 하기 위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자꾸만 더 주입시켜줘야 했다는 고백들. 바로 그 고백들이, 흑인식으로 번안되어 <씨너스> 안에 깃들어 있다. 흑인 감독인 라이언 쿠글러의 손에 의해 빚어진 <씨너스>는 그렇게 현대를 살아가는 유색인종들의 문화적 말살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호러적 측면에서 파괴력이 약한 것은 인정할 만한 단점이다. 하지만 <씨너스>는 그 호러로 돌입하기 전까지의 드라마들도 꽤 재미있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확고하고, 그들 사이 촘촘한 관계망들이 끈덕지다. 여기에 비즈니스 드라마로 시작해 음악 영화를 거쳐 호러로 갔다 끝끝내는 블랙스플로테이션 장르로 이어지는 장르 여정도 흥미롭다. 스타 파워 역시 과연 무시할 수 없을 것. 마이클 B 조던은 결이 다른 1인 2역으로 영화의 재미를 뽑아내고 헤일리 스텐필드와 운미 모사쿠, 잭 오코넬을 위시한 조연진들도 연기적으로나 외향적으로나 모두 안정적. 그리고 감독인 라이언 쿠글러의 야심 역시 무척이나 단단하다. 새미의 첫 블루스 무대 데뷔 장면에서 펼쳐진, 이른바 과거와 현재와 심지어는 미래까지도 모조리 열어버리는 롱테이크 뮤지컬 씬은 그 자체로 대단한 구경거리였다고 할 수밖에.
함께 힘을 합쳐 KKK단 소속의 백인들에게 대항해도 모자랄 판국에, 니거라 불렸던 흑인과 화이트 니거라 불렸던 아일랜드 출신 백인이 서로를 갈라치기하며 이합집산한다. 모두 다 빼앗긴 자들끼리 모여 그 안에서 벌어진 내홍과 내분. 그런데 또 뱀파이어들의 수장인 렘믹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전사 설명이 없고. 그런데 그 패기가 좋았다. 장르적 변환에 시동을 거는 렘믹의 갑작스런 첫 등장도 만족스러웠고.
영화 개봉 후 25년이 지나면 <씨너스>에 대한 권리는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에서 감독이자 각본가인 라이언 쿠글러에게로 돌아온다-는 조항을 계약에 포함했다 들었다.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권리. 영화의 생애주기로 보면 25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 사이에 불안감이 팽배해오고 있다 들었다. 모름지기 스튜디오란 제작한 영화들로 자사의 필모그래피를 아카이빙하는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니까. 이렇게 가다간 크리스토퍼 놀란도, 아리 애스터도 다 비슷한 걸 요구해오지 않겠냐는 불안감인 거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경제적 견해들을 다 배제하고 본다면 라이언 쿠글러는 그 계약 조항을 통해 영화의 바깥에서 <씨너스>의 메시지에 다시금 불을 붙이고 있다 생각한다. 결코 기존 체계 안에 자신의 것을 녹여내지 않겠다는 선언. 직접 각본을 쓰고는 <씨너스>야말로 가장 자신다운 영화라고 이야기했던 감독이니, 어쩌면 그 계약조항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에게 있어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었나 보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경험. 모든 관습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또 주워담으며 황혼에서 새벽, 그리고 미래까지 달려가는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당분간 자꾸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먼 훗날에도 가끔씩 돌이켜보게 될 것 같다.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던 노년의 새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