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도 뭘 줬는지 모르던 우리들의 그 여자

<늑대아이>

by CINEKOON

부모됨과 자식됨. 보통은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고 훈육한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자식 관계는 사실 교학상장에 더 가깝다. 일방향 가르침이 아닌 양방향의 성장. 자식은 훈육으로부터 배우고 부모는 육아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그 성장은 본능으로 포장된 본질이라 무척이나 고결하다.


유키와 아메, 두 아이의 성장 곡선이 재밌다. 늑대아이로서 늑대의 삶과 인간의 삶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하는 운명. 육아 초반까지만 보면 활기차고 들뜨는 유키는 영락없는 늑대의 삶을, 반면 소심하고 침착한 아메는 확실히 인간의 삶을 택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아이는 성장의 어느 지점에서 변곡점을 맞이하고, 이후 교차로 서로의 그래프를 통과한 후 완전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유키는 일종의 사회화 과정을 거쳐 인간의 길로, 침착한만큼 스스로를 더 깊게 들여다보던 아메는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가 되어 자연의 길로. 아이들의 미래란 이토록 재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예측불가한 육아의 길에, 하나가 있다. 일찌기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삶과 부딪혀 나가며 두 아이를 길러낸 용자. 마왕을 물리친 것도, 그래서 세상을 구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단연코 그녀를 용자라 부르고 싶다. 자신조차 몰랐던 가능성 충만의 세계를 무려 둘이나 낳고 길러내 반쯤 완성시킨 여자. 그런 여자를 두고 용자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용자라 불릴 자격 있겠는가. 심지어 육아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 의무교육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항도 아니니까. 전혀 모르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두 세계나 구해냈으니 이 또한 용자가 아니면 무엇이랴.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썸머워즈> 이후, 호소다 마모루가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만큼 연출적, 기술적 완성도가 높다. 유키와 아메 두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학교 복도에서의 단일 트래킹 샷 하나만으로도 소리없이 표현해낼 수 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실사 영화에서는 하기 힘든 연출이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 있어서 더 멋지다. 여기에 이어 한 번 더 시간을 달려 뛰어넘는 하나와 유키, 아메 세 가족의 눈밭 위 질주 또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하나의 심포니를 이루는듯해 벅차고.


나는 언제나 생각해왔다. 그간 봐왔던 수많은 영화들 중 단 한 편 안으로 들어가 하루동안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다면 누굴 골라야할까. 우주를 구한 루크 스카이워커? 하늘 높이 비상하며 구름 사이를 넘나드는 슈퍼맨? 그것들 역시도 좋은 선택이겠지만, 꼭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늑대아이> 속 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하나의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을 잃곤 빗속에서 그저 주저앉았던 하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우산을 씌워줬던 얼굴 없는 단역의 남자. 바로 그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냥 묵묵히 하나를 위로하고 또 응원하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또 응원해주고 싶게 만드는 하나의 이야기. 두 아이를 길러내며 그들을 잡아줘야할 때도, 그리고 보내줘야할 때도 배우고 깨달은 그 엄마의 이야기. 아이를 기르는 게 이다지도 힘겹다. 그리고 이토록 기쁘다. <늑대아이>는 엔딩크레딧에 이르러 주제가의 서정적인 선율과 슬픔어린 가사를 통해 그 힘듦과 기쁨을 모두 선사해낸다. 개봉당시 극장에서 처음 봤던 그 날이 아직도 떠오른다. 엔딩크레딧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엉엉 울었었고, 그 여진은 길었었지. 무려 13년이 지나 다시 본 지금에도 어쩌면 그 눈물과 여진은 지속되고 있는지도. 13년. 13년이라... 세월이 참 빠르다. 그새 우리의 유키와 아메는 얼마나 컸을까? 또, 주고도 뭘 줬는지 모르던 우리의 하나는 그새 얼마나 더 배웠을까?


tempImageVifcAi.heic <늑대아이> / 호소다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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