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무샤>
서구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동양의 스타일로 풀어내는데 거의 경지에 올라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거시적으로 보면 거대 규모의 엑스트라 촬영과 수십 마리의 말들을 대동한 전투장면 촬영, 화려하고 거대한 세트 및 로케이션 촬영 등 그냥 있는 그대로만 봐도 대단한 스펙터클의 영화다. 근데 대단한 건, 거시적인 면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미시적으로 봤을 때도 굉장히 세련되면서 전위적인 연출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점.
막말로 거대 규모의 스펙터클만 있는 영화였다면 이 정도로 인정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허나 구로사와 아키라는 격렬한 전장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도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았던 한 남자의 심리를 명백하고도 기깔나게 표현해 보여준다. 주인공의 뒤숭숭한 꿈 장면 씬은 그래서 대단하다. 사실 이런 걸 이렇게 길게 만들어 넣으면 대중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감이 안 서잖아. 근데 아키라는 그냥 밀어 붙였다. 근데 그것도 그냥 밀어 붙인 게 아니라 겁날 정도로 완벽하게 밀어붙였음. 알록달록해 멀리서 보면 흡사 탱화를 연상케하는 스튜디오 세트에서의 두 남자 모습. 롱 테이크로 일관하다가 잔잔한 수면을 통한 심리 전달, 그리고 이어지는 매치 컷. 물장구 치는 꿈꾸다 기겁하여 일어났는데 거기서 파도 그림을 깔다니. 정말이지 영민한 연출자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꿈 장면에서 투명하게 보이듯이, 영화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쥐고 있지 못한 자의 불안하고 답답한 상태를 잘 보여준다. 그림자에 색칠한다고 실체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걸 알면서도 주인공은 운명의 부름에 응했고, 결국 파국 아닌 파국을 맞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 중에서도 비극적 엔딩 탑에 든다고 본다.
근데 웃긴 게, 카게무샤로서 대활약했다기에는 주인공 스스로가 성취해 해낸 게 별로 없다는 거. 태어나기 전에 자기 얼굴 선택할 순 없는 것이니 다이묘랑 비슷한 생김새 가진 거야 얻어걸린 거고, 많은 부하들 앞에서 망신 당할 위기였는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순전히 임기응변이었지 않은가. 물론 순발력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만... 하긴, 우리 나라의 <광해 - 왕이 된 남자>처럼 그 자리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차지하려 드는 전개는 안 어울리긴 하지. 결국 허무주의로 끝나는 영화이니 순전히 다 얻어걸린 전개가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 능력으로 일군 모든 걸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보다, 운이 닿아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손 안에 들어온 모든 게 허망하게 싹 사라져버리는 게 더 절망적이지 않을까.
영화 내내 물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그림자의 실체라 할 수 있을 다이묘 신겐은 죽음을 맞이한 후 호수에 수장되고, 그 실체를 따르는 그림자였던 카게무샤는 꿈 속 호수에서 신겐을 다시 만난다. 잔잔한 수면 위에 일렁였던 것은 실체였을까, 그림자였을까. 영화 결말부에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면서까지 카게무샤가 잡으려 했던 것은 강물에 잠긴 신겐의 깃발이었다. 결국 깃발을 다시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로 물에 떠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는 내가 다 허망해졌다. 그럼에도 수장된 실체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최후를 맞이 했으니,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