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인생 영화'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영화를 보는 기준을 통해 취향이나 성향까지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질문이다. 나도 나름 인생 영화로 꼽는 영화들이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그래서 몇 번이고 본 영화. 문득 생각나는 영화. 내 기준에서 최고로 잘 만든 영화. 그런데 얼마 전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여러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사이, 다음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청년 A. 낙심한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방구석에서 주구장창 영화만 봤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그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봤다. 죽음을 앞둔 남자 둘이서 바다를 향해 떠나는, 조금은 뻔한 이야기.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해변에 도착하는 마지막 엔딩 장면은 그에게 큰 감동이었다. 영화가 끝난 새벽 6시, 그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정동진 바닷가에서 그는 담배를 피우며 병나발을 불고 옆으로 쓰러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내고 있을 때, 가톨릭관동대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흉내 내는 것이냐고. 그는 그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며 무일푼인 A에게 술을 사줬다.
A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독립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침 행사 중인 '정동진독립영화제'에 갔다. 그리고 A는 이곳에서 언젠가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막연한 꿈을 품는다. 결국 삼수에 실패하고 군대에 가서 시나리오 작법을 독학한 그는, 8년 뒤 정동진에서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방구석에서 우연히 본 영화. 그리고 영화에 감명받아 무작정 떠났던 정동진. 그리고 그에게 술을 사주고 차비를 쥐여주던 대학생. 영화로 이어진 인연은 그의 인생을 영화로 이끌었다. A는 '우린 액션배우다', '내가 살인범이다', '악녀'를 연출한 정병길 감독이다.
이처럼 극적인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내 인생에 영향을 주었고. 소중했던 한때를 떠오르게 하는 영화들. 이런 영화가 진짜 인생 영화가 아닐까? 인생 영화를 다시 고르려면 본 영화 목록과 함께 내 기억을 돌이켜 볼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 질문에 아직은 비밀이라며 대답을 미뤘다.